나는 나름 어렸을 때 문학소녀였다. 예전에도 얘기한 적 있는데, 초등학생 때만 해도 쉬는 시간에 교실에서 책 읽는 애가 나였다. (<- 진짜다!) 그때 읽던 책들은 주로 청소년 대상의 명작 소설들이었는데, 대부분 외국 소설들이었다. 그래서 그 책들을 읽으며 내가 '한번쯤 경험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몇가지 있다. 예를 들면 기숙학교, 스쿨버스, 댄스파티! 같은 것들이 그런 거였다.
이런 것에 대한 환상은, 품고 있던 기간은 길었으나, 깨질 때는 아주 빠르고 신속했다. 초중고를 모두 걸어다녀서 스쿨버스 같은 것에 대한 환상이 좀 있었는데 대학때 한시간 반을 버스타고 다니면서 '학교는 가까운 것이 최고다'라는 진리를 깨달았고, 역시 대학 때 기숙사 오픈하우스 때 친구한테 놀러갔다가 기숙사가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댄스파티-는 사실 그보다 더 빨리 깨달을 수 있었다. 초딩 때부터 알았던 것 같다. 나는 몸치였던 것이다! 음악이 나와도 나의 몸은 좀처럼 움직일 줄을 모르더라..
오늘 소개할 영화는, 그런 나와 정반대로(?) 춤에 대한 열정을 좀처럼 숨기지 못하는 여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다.
(이런 말로 이 영화를 소개하는 것이 좀 미안하게 느껴지지만..)
요새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내가 어릴 때는 고전 영화들에 대한 향수가 일상적으로 존재했다. TV에서도 틈틈이 오래된 영화들을 해줬고, 그렇게 나는 줄리 앤드루스와 오드리 햅번과 비비안 리를 알았다. 가장 많이 본 영화는 줄리 앤드루스가 출연한 <메리 포핀스>와 <사운드 오브 뮤직> 이었지만, 개인적인 취향으로 가장 예쁘다고 생각한 것은 비비안 리였다. 영화에서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더빙된 스칼렛 오하라는 너무너무 예뻤다- 그 즈음에 놀러갔던 친척집에서 원작 소설을 발견하곤 단숨에 읽은 기억도 난다. (그 책은 결국 친척 언니가 내게 가지라고 줬다.. ㅎ)
그 이후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도 봤고 <애수>도 봤지만 사실 내용이 잘 기억이 안 난다.. 내게 비비안 리는 스칼렛 오하라 그 자체였다. 하얀 살결, 가는 허리, 녹색 눈동자와 묘한 미소를 가졌다는 책 속의 스칼렛 오하라에 대한 묘사는 비비안 리에게 그대로 들어맞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최소한 다섯번 이상은 봤을 것이다. 풀로 쭉 보기보다는 중간중간 잘라 본 적이 더 많아서 정확히 셀 수가 없다. 어렸을 때는 이 영화의 전반부만 좋아해서 앞부분을 주로 봤다. 아마 남북전쟁 이후의 무거운 이야기가 싫었던 것 같다. 상대적으로 앞부분은 좀 더 발랄하고 경쾌한 느낌이어서 좋았다.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트웰브 오크스에서의 파티 장면이다. 애슐리가 멜라니랑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애슐리를 도로 꼬셔서 자기와 결혼하게 만들려고 마음먹은 스칼렛이 한껏 예쁘게 꾸미고 가서 애슐리의 질투 유발을 위해 이 남자 저 남자를 마구 꼬시는데, 마침내 파티에 참석한 거의 대부분의 남자들이 자신들의 애인들을 잊은 채 스칼렛의 발치에 앉아 그녀가 뭐 하나라도 시켜주길 바라고 있는, 저런 거. 현실적으로 내 옆에 저런 여자가 있었다면 엄청 싫어했겠지만 영화이기 때문에 기묘한 카타르시스가 있다. ㅎㅎ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부분 역시 파티 장면이다.
애슐리의 마음을 돌리는 데 실패하고 레트 버틀러에게 창피한 순간을 목격당한 스칼렛은 홧김에 찰스 해밀턴과 결혼해버리는데, 결혼하자마자 입대한 찰스는 어이없게도 전쟁에는 나가보지도 못한 채 폐렴으로 죽는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버린 스칼렛은 상복을 입고 죽은 남편을 그리며 조신하게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는데, 당최 성격에 안 맞아서 살 수가 없다. 그러던 중 군 병원 기금 모금을 위한 자선 파티가 열리고, 스칼렛은 과감하게도 상복을 입고 참석한다.
착하디 착한 멜라니는 오해라고 스칼렛을 두둔하지만..
스칼렛의 발은 남들 몰래 음악에 맞춰 빠르게 스텝을 밟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기금 마련의 방법으로, 미드 박사가 의견을 제시한다. 신사들로 하여금 같이 참석한 숙녀에게 돈을 걸게 하는 것. 남자들이 20달러, 25달러씩 소심하게 부르기 시작할 때, 레트 버틀러가 등장한다.
춤을 출 수 있다는 사실만이 신난, 검은 상복 차림의 스칼렛은 발랄하게 리드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고, 그녀와 레트 버틀러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뭔가 무감동하게 박수를 친다.
스칼렛은 작품 속에서도 남자들에게서는 매력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반면 멜라니를 제외한 모든 여자들에게서는 미움을 받는다. 사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스칼렛의 첫번째 남편과 두번째 남편은 이미 애인이 있는 사람들을 빼앗은 것이었고, 그렇게 애인을 빼앗긴 사람 중 하나는 스칼렛의 친 여동생이기도 했다. 애슐리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못해서 애슐리와 함께 있는 모습을 들켜 망신을 당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평가가 좋지 않았던 레트는 보니가 태어난 이후 딸만큼은 점잖은 사람들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며 평소 업신여겼던 나이든 부인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스칼렛은, 정말 그 자체로 너무나 매력적이다. 단순하면서도 열정적이고, 목표가 뚜렷하고, 원하는 것을 쟁취해내고야 마는 생명력이 펄펄 뛴다. 무엇보다도, 어떤 영화에서도 스칼렛처럼 화내는 모습이 매력적인 캐릭터는 보기 힘들 것이다.. 레트가 바로 그 점에 스칼렛에게 반했듯이, 관객도 그 점 때문에 스칼렛을 좋아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앞서도 말했지만, 영화이기 때문에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ㅋㅋㅋㅋ 저렇게 한번쯤 여왕벌이 되어서 남자들을 휘어잡고 살아보는 인생.. 일단 저렇게 예쁘게 태어나는 인생..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이 영화를 한번 더 쭈욱 봤는데, (영화가 길어서 보기 힘들었다.. ) 나는 분명 스칼렛 오하라로 태어났어도 저렇게 살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아마도 수엘렌처럼 살거나, 파티에 참석한 그 수많은 여자들 중 하나로 소리소문없이 살다 갔겠지.
마치 지금처럼.
음..
결국은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살던간에, 열정적으로, 목표를 가지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투쟁하면서 살아야 하는 건가 보다.
그런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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