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학기 교과서를 받으면 제일 먼저 국어책을 펴서 어떤 소설과 무슨 시가 실려 있는지를 파악한 다음, 음악책을 펼쳐 내가 연주할 수 있거나 이미 알고 있는 곡들을 찾아보고, 그런 다음엔 미술책을 열어보곤 했다. 도저히 이름이 외워지지 않는 어려운 발음의 화가들이 그려낸 작품들을 책으로나마 감상하면서 그야말로 눈요기를 했다, 퐁피두니 오르세니 하는 프랑스의 유명한 미술관 이름을 중얼거려 보기도 하고, 몬드리앙과 앤디 워홀에 열광했다. (내가 몬드리앙을 좋아한 건 그 그림을 정확히, 똑같이 따라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는 건 비밀이다.)
세계의 명화들이 각각의 사조별로 모여 있던 어느 해 미술책에서, 이 그림을 처음 본 순간, 나는 말 그대로 취향을 저격당했다.
프리다 칼로, <도로시 헤일의 초상>, 1939년 작.
멕시코 출신의 이 여성 화가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샘솟는,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였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자료를 찾기는 어려웠고 대신 학교 도서관에서 비슷한 시기 비슷한 화풍을 가진 화가들의 작품이 모여 있는 명화집에서 다른 몇 편의 그림을 찾아내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녀가 디에고 리베라의 연인이었다는 것, 어려서의 사고로 평생을 고통받았다는 것, 수 차례의 수술과 기나긴 병원 생활 끝에 결국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10대 후반에 알았다. 그리고 나이를 훌쩍 먹은 다음 이 책을 "발견"했다.
그건 정말 발견 이었다. 나는 프리다 칼로를 까맣게 잊고 있었고, 꼭 읽고 싶은 책이 있어서 온라인 서점에 접속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습관처럼 인터넷에 접속해서 도서점 사이트를 열었다가 우연히, 그야말로 우연히 이 책이 눈에 들어온 것 뿐이었다. 못에 찔려 피흘리는 예수의 그것 같은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이 담긴 표지의 이 책은 그렇게 내 손에 들어왔다.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 나아가서는 남미, 더 크게는 세계적으로 초현실주의적 사조의 작품들을 그려낸 여성 화가다. 밝지 않은 피부색, 남미 여성 특유의 다모증으로 콧수염이 거뭇하게 자라고 눈썹 사이에까지 체모가 자라서 일자 눈썹을 연상케 하는 외모를 가진 프리다 칼로를 예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녀가 갖고 있는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은- 정확히는 불행에 가까운 삶을 알고 나서 카메라 렌즈를 또렷이 응시하고 있는 프리다 칼로의 검은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프리다가 얼마나 아름답고 강인하며 매력적인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행이라고 할 정도의 엄청난 사고, 디에고 리베라와의 운명적인 만남, 디에고의 끊임 없는 외도와 사고 후유증에서 비롯된 반복된 수술, 유산, 기댈 곳도 믿을 곳도 없던 가냘픈 여성은 그림을 통해 자신이 상처를 보듬고 자신의 생존을 증명하는 고통스러운 길을 택한다. 천재적인 재능과 타고난 강인함으로 탄생한 그녀의 그림들은 그래서 한 인간의 투쟁의 역사다. 그 투쟁 가운데서도 디에고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감출 길 없었던 뜨겁고 정열적인 여자가 프리다였다. 디에고 또한 프리다를 사랑했는데도, 이 두 천재 화가는 결국 파경을 맞았고, 파경을 맞은 후에도 친구 이상의 사이를 유지하는 독특한 행보를 보인다. 어쩌면 이들에게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살아남기 위해 치열히 싸우는 삶을 살았던 프리다 칼로의 많은 평전들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는 책, 헤이든 헤레라의 프리다 칼로 추천. 이렇게 11월도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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