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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01204 / 다양성] I'm beautiful in my way 'Cause God makes no mistakes by 에일레스

몇해 전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아침 출근길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회사를 향해 걷고 있는데, 엄청 높은 빨강색 가죽 킬힐을 신고 민소매 모피 조끼를 입은 여자가 걸어가고 있는 거였다. '와 진짜 저렇게 입는 여자가 다 있네' 생각하면서 회사 동기에게 문자를 보냈었다. 지금 이래저래한 여자가 내 앞에 있다! 라고. 동기는 나도 그런 여자 본 적 있다며 답을 했고, 그렇게 문자를 주고받으며 계속 걸어가는데, 엇- 그 여자가 우리 회사 건물로 들어가는 거였다!

알고보니 그 여자는 입사한지 얼마 안된 우리 회사 직원이었다. 신입이라 내가 잘 몰랐던 거였다.

그녀를 C양이라고 부르자.

 

C양은 나보다 두살인가 아래였는데, 누가 봐도 정말 눈에 확 띌 정도로 튀는 스타일이었다. 체형은 엄청 말랐는데 진짜 화려하게 입고 다녔다. C양이 신는 구두들은 하나같이 서인영 저리가라 할 정도의 킬힐이었고, 그 킬힐도 그냥 굽만 높은 것이 아니라 뭔가 반짝거리거나 완전 튀는 색깔 뿐이었다. 여름이면 배꼽티에 가까운 옷을 입고 출근했고, 겨울이면 멀리서 봐도 나풀나풀한 털이 보이는 모피를 입고 다녔다.

 

솔직히, 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스타일이었다. 전해 듣기로는 성격도 상당히 '차도녀' 타입이라고 했다.

다행히(?) 일적으로도 별로 얽힐 일이 없어서 그닥 자주 마주치지 않았고, 1~2년쯤 후에 C양은 우리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난 아직 다닌다......)

 

C양과 다시 만난 것은 SNS를 통해서였다. 내가 이용하는 SNS 중에 하나가 어쩌다보니 회사 사람들하고도 친구를 잔뜩 맺게 되었는데, 어느날 그녀가 친구신청을 해왔다. 조금 고민하다가 나는 결국 수락했고, 그 이후로 본의아니게 C양의 생활(?)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예상 외로, C양은 그냥 평범한 그 또래 아가씨였다. 기념일이면 남자친구랑 맛있는 걸 먹으러 가고, 공연보는 걸 좋아하고, 사진을 전공해서 미적 감각이 좀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러니 스타일에도 그렇게 신경을 썼구나-하는 것이 비로소 이해가 갔다.)

내가 심플한 것을 좋아하듯이, C양은 그냥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취향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다.

 

C양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순간부터 약간 반성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너무 나만의 사고방식에 기대어 모든 것을 재단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그리고 어제 이 영화를 봤다.

 

 


제인 에어 (0000)

Jane Eyre 
8.9
감독
프랑코 제피렐리
출연
윌리엄 허트, 샬롯 갱스부르, 안나 파킨, 마리아 슈나이더, 존 우드
정보
로맨스/멜로 | 프랑스, 영국 | 110 분 | 0000-00-00

 

제인 에어라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샬롯 브론테의 소설은 지금까지 수없이 영화화됐다. 그 중 내가 고른 것은 1996년작이다.

 

이 영화의 앞부분은 외숙모의 집에서 자라던 고아 소녀 제인이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격렬하고도 열정적인 제인은 한순간도 고분고분하지 않고, 외숙모인 리드 부인은 제인을 기숙학교인 로우드 학교로 보내버린다.

로우드 학교는 엄하고 혹독한 방법으로 아이들을 다루고 있었지만, 거기서 제인은 처음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난다. 제인의 첫번째 친구인 헬렌 번즈였다.

 

이 영화에서 어린 제인은 다양한 고통을 겪는데, 그 중에서 내가 제일 분노했던 장면이 이거였다.

 

 

 

 

 

 

 

 

 

 

 

 

 

 

 

 

 

 

 

 

 

 

 

 

 

 

 

 

 

 

 

 

 

 

 

 

 

 

 

 

 

 

 

 

 

 

 

 

 

로우드 학교의 이사장인 브로클허스트는 헬렌의 타고난 붉은 곱슬머리를 허영의 상징이라며 잘라버리고 만다. 물론 격분한 제인은 자기도 같이 머리를 잘라버린다.

이 장면에서 화가 났던 것은 브로클허스트의 행동이 말 그대로 '억지'였기 때문이다. 곱슬머리, 그리고 빨강머리에 대한 지독한 편견으로부터 비롯된.

 

이런 사례는 사실 지금까지도 많이 볼 수 있다. 나의 큰아버지는 왼손잡이였지만 왼손을 쓰지 못하게 하신 할아버지 때문에 오른손을 써야 했다. (지금은 양손을 다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종교적 터부는 레이디 가가의 공연날 기독교 단체들이 반대 집회를 벌이는 촌극까지 발생시키는 판이다.

그리고 나름 성숙한 개념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던 에일레스(← 나;;;;)는 자신과 다른 스타일이라 해서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아주 쉽게,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생각하고 사물을 재단한다. 특히 어떤 것의 외양에 대해서 더욱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그런 것을 편견이라고 부른다. 편견은 잘못된 거라고,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배우긴 하지만, 이미 사회 전반적으로 굳어져버린 어떤 인식이 있는 것 같다.

 

다른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달라서 더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제인 에어]가 특별한 작품이었던 것은 그녀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가는, 당시에 볼 수 없는 여성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발전해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얼마전 C양과 SNS에서 공연 얘기를 나누다 C양이 말했다. 같은 회사 다닐 때 공연 얘기 많이 했으면 좋았을걸 그랬다고.

그러게 말이다.

정말 그랬으면 좋았을텐데.

 

나는 아직 배울 것이 많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