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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01201 / 관계]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 by 란테곰

"아, 제3자는 빠지라구요 형."
 

바로 저번주 쯤 새로 짠 동작 좀 봐달라며, 괜찮다 했더니 신이 나 웃던 녀석의 입에서 오늘 나온 말은 용인 남자를 잔뜩 흥분하게 만들었다. 문제가 생긴 것을 말리려다 들은 녀석의 말 한 마디에 흥분한 용인 남자는 그만 그 녀석의 귓방망이를 올려붙일 뻔 했는데, 참 이게 뭐라고 이렇게 난리인가 싶어 성을 죽이고자 애썼다. 어째서, 왜 이렇게 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보단 당장 벌어진 이 난리통에 곁들여 흥분한 심정을 어떻게든 수습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던 용인 남자는 그 녀석의 말대로 제3자의 자세로 한 걸음 물러서 있었고, 결국 그 녀석을 필두로 모인 몇몇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져가는 것에 성공했다. 그것은 바로 동호회의 분리와 그 분리된 조각에의 운영권이었다.




우연한 계기로 인연을 맺은 대구 남자 둘과 용인 남자 하나는, 딱 한 번 만난 것을 계기로 해 같이 사는 것에 합의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구 남자 둘 사이에 용인 남자 하나가 얹혀 사는 모양새였지만 대구 남자 둘은 크게 개의치 않아했고, 용인 남자는 그것에 고마워했다. 그렇게 셋은 함께 살아가며 셋의 인연을 맺게 해준 게임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피씨방에서 야간 알바를 하는 중에 나이키를 연습하고, 동영상을 챙겨보고, 채보를 뽑아 움직임을 짜고. 밥은 제대로 못 먹더라도 오락실에 갈 돈은 있었고, 오락실에서 매일 보다시피 하는 애들에겐 간간히 밥도 사주고.


그러다 대구 남자 둘과 용인 남자 하나는 '제대로 하는, 팀에 가까운 모임을 만들자' 라는 의견에 합의하여 팀을 만들었다. 하지만 소수 정예로 가고팠던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대구 남자 둘의 이전 동호회에서의 어마어마했던 입김과 인지도 때문에 그 꿈이 마음대로 되지 않게 되자, 셋은 '동호회를 만들고, 그 속에 팀을 따로 관리하자' 는 생각으로 새로운 동호회를 만들게 된다. 즉, 팀원은 팀과 동호회 양쪽 모두의 소속이고, 동호회 내에서 팀으로 올라가기 위해선 나름대로의 테스트 혹은 인정을 받아야 가능하다는 식의 모임이 된 것이다. 어차피 대상은 시내 오락실에서 자주 만나는 아이들 뿐이었지만 그 때의 세 명은 꽤나 진지하게 이 부분에 대해 고민했었다. 팀이라 해야 겨우 열 명 남짓, 동호회라고 해야 삼십 명 정도의 모임였을 뿐인데도. 


그렇게 처음엔 작디 작은 모임이었으나, 대구 남자 둘이 속해있던 이전 동호회가 무너지며 그 인원이 대부분 흡수되었고 거기에 신규 인원까지 포함되어 '시내 오락실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들의 모임' 이었던 동호회는 조금씩 세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매일 매일 오락실에서 만났지만 오락실 밖에서도 같이 놀아보자는 생각으로 열었던 첫 정모에 50명 가까운 인원이 찾아와 자기 소개 하는데만 한 시간이 걸리고, 밥집을 물색하는 것에 고생한 이후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모임 장소 및 동선에 대한 고민, 회비 책정 등등 산적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구 남자 둘과 용인 남자 하나는 고민 또 고민을 하는 나날을 보냈다. 이제 겨우 고등학생, 어리면 중학생인 아이들이 많았던 탓에 금전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대구 남자 하나가 짊어지고, 다른 대구 남자와 용인 남자는 모임에 참석한 아이들을 챙기고 또 즐거웁게 놀 수 있는 방법을 물색하고 장소를 섭외하는 등 각자 맡은 일을 세분화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고선 매 달마다 정모를 진행해 나갔고, 맨 처음에 세웠던 '팀 > 동호회' 라는 기준은 눈녹듯 사라져 모두가 팀은 잊고 동호회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회원 수는 점점 늘어나 불과 1년만에 800명 가까이로 늘어나는, 동네 모임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덩치 큰 모임으로 거듭났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했던가. 그 작은 모임에서도 나름 인지도가 있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이 실리기 시작한 몇몇 아이들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구 남자 둘과 용인 남자는 진즉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으나, 아직 덜 큰 아이들에게 쓴소리를 내뱉기엔 마음이 너무 여렸고 또 그런 말을 어찌 해야 좋을지도 몰랐다. 좋은 형이고 착한 오빠이고픈 마음이 강했는지, 조금 지나면 알아서들 깨닫겠거니 하는 마음이었는지. 혹은 둘 다였는지. 그저 어떻게든 아이들을 믿는 마음으로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만 했다.


하지만, 방관에 가까웠던 대구 남자 둘과 용인 남자의 생각은 결국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호회는 분리되고, 이후로도 조금씩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밀물처럼 밀려오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빈 자리는 단순한 숫자를 넘어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도 쉬이 채워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남아있던 사람들은 '우리끼리 재미나게 놀자' 를 모토로 잡아 계속 모임을 유지했다. 가끔 오락실에서 빠져나간 사람들과 마주칠때면 서로 모른 척 하기 바쁜 껄끄러운 상황에서도 우린 우리 모임을 유지하는 것에 집중했고, 그 집중은 옳게 작용해 분위기가 조금씩 다잡히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며 동호회에서 즐기던 게임이 점점 오락실에서 밀려남에 따라 회원 수는 점점 줄어갔지만, '
동호회의 탄생 목적' 인 게임이 오락실에서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기점으로 우리의 모임은 주로 밖에서 이루어졌다. 공원에 모여 남녀 안 가리고 편을 나눠 말뚝박기를 하고, 요즘 버라이어티에 자주 나오는 몸으로 말해요 등의 게임도 하고, 노래방에서 -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미친 듯이 - 놀고. 처음 만났을 때 고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은 어느새 우리와 뒷풀이 자리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담배도 피울 즈음, 특히 남자아이들은 군대에 갔거나 이미 다녀온 나이가 되었을 즈음이었다. 모임의 재미를 느낀 아이들이 친구들을 하나둘씩 불러오다 보니 일정 숫자의 인원에서 가끔 소개를 통해 가입하는 사람 한 두명이 늘어나는 단계, 이른 바 소모임의 완성형을 이루는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그렇게 완성화된 소모임에서 매 달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새로운 게임에 빠진 용인 남자는, 새로운 게임에서 대구 지역에 만들어진 팀에 가입하게 되었다. 팀원을 메인으로 한 카페를 꾸리던 그 팀은 대구 지역에선 제일 처음 만들어진 팀이었기에 카페에 신규 회원 유입이 많았고, 그 모임에서 얼렁뚱땅 운영진의 자리를 꿰차고 앉게 된 용인 남자는 자연스레 사람들을 만나고, 인사를 나누고, 알게 되는 일이 자주 생겨났다. 이전 모임에서의 좋을 수 없는 기억이 약이 되어 문제가 생기기 전에 조용히 마무리짓는 등 나름대로의 관록도 붙었다.


그러다, 언제였더라. 몇 자리가 빈 팀원 수급을 위해 형님 몇 분과 용인 남자가 오락실에서 괜찮은 애들을 찾던 중, 누군가가 용인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누굴까 싶어 돌아보니 몇년 전 "아, 제3자는 빠지라구요 형" 이라 쏘아붙였던 바로 그 녀석이었다. "와, 형. 진짜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라며 어찌나 반갑게 인사를 하는지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었다. 자기가 짠 퍼포라며, 봐달라며 용인 남자에게 물었을 때의 표정이 다시 돌아온 느낌이었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내게 그렇게 웃으며 인사를 하냐 쏘아붙이려던 용인 남자는, '그래. 어차피 지난 일이고 결국 남을 사람은 남아 잘 놀고 있는데다, 너희가 데려간 사람들과 만든 모임은 불과 석 달 만에 무너졌다는 얘기도 들었으니 네가 나름 깨달은 부분이 있겠지' 라는 생각에 웃으며 그 녀석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 녀석도 나름 아랫도리 두둑해질 나이였으니 껄끄런 마음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하는 것이겠거니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오락실에서 두어번 마주쳤을 즈음, 타 지역 원정 진행을 위해 형님 몇 분과 팀원이 모여 얘기를 나누던 중 우연히 자리를 함께 하게 된 그 녀석이 용인 남자에게 알은체를 해왔다. 가볍게 인사를 해주고 다시 얘기를 진행하는 것을 옆에서 힐끗힐끗 얘길 엿듣고 있던 그 녀석이 용인 남자를 잠깐 불렀다. 무슨 일일까 싶어 이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웠는데, 그 녀석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용인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형, 형 지금 팀장이라면서요? 제가 그 팀에 진- 짜 들어가고 싶은데, 아직 실력이 안 되서... 그래도 형 있으니 어떻게 좀 안 될까요? 연습 진짜 많이 할게요!"


용인 남자는 입에서 새어나오는 한숨을 억지로 감추려 애쓰고는, 곧 대답했다. 


"아... 지금 얘기 중이니까... 제3자는 좀..."



거절당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가 곧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허옇게 질린 그 녀석은, 몇 마디 궁시렁대다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리고 용인 남자는, 아직 덜 컸다는 자책감 반에 갚아주었다는 기분 반이 섞인 일그러진 웃음을 지으며 그 녀석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