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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아닌 어떤 세상

[에일레스] 옛날 이야기

그녀의 책상 아래쪽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는 아무도 모르는 책 한권이 숨겨져 있었다.

아주 오래 전, 그녀가 누군가를 짝사랑하던 시절에, 100일 동안 매일 빠짐없이 일기를 쓰면 책을 만들어주는 어떤 사이트를 통해 만든 것이었다.

그녀는 그를 향해 100일간의 일기를 썼다.

일기는 온통 그를 생각하던 그녀의 하루하루가 담겼다.

그 때문에 즐거웠던 날도, 그 때문에 슬펐던 날도.

 

처음에 그녀는 일기를 다 쓰고 책이 나오면 그에게 고백을 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책을 주면서.

그러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마음이 후련해지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00일이 진행되는 동안, 생각이 바뀌었다.

그가 그녀가 생각했던 만큼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인지, 그에게 고백했을 때의 결과가 뻔해서였을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녀는 100일간의 일기가 끝나고 나면 그를 향한 마음을 정리하리라고 마음 먹었다.

 

그렇게 100일이 지났고, 그녀는 담배나 술을 끊어버리듯 마음을 끊어버리기로 했다.

책은 기념으로 만들어 갖고 있고 싶어서, 받는 것으로 신청을 해 버렸다.

그렇게 그 책은 그녀의 서랍 안에서 오래 잠들어 있었다.

 

사실 그녀의 계획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애초에 마음 먹었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쉽게 마음을 정리하지는 못했고, 그렇게 한참을 더 질질 끌려갔다.

 

아주 가끔, 그녀는 서랍 깊숙히 있던 그 책을 꺼내 읽었다.

책 속의 일기들은 때로는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고, 때로는 절망이 되었다. 

어떤 때는 계속 마음을 이어갈 힘을 얻기도 했고, 어떤 때는 스스로에게 병신이라고 중얼거리며 덮어버리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년이 지난 어느 날이 되어서야, 그녀는 서랍 속의 그 책을 꺼냈다.

책은 가방에 담겼고, 그녀는 출근하는 길의 지하철역 화장실의 아무 칸에나 들어가 책을 꺼내어 집어넣었다.

 

그건 그녀가 그제서야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묻어둔 마음도 마음이라는 것을.

버려야만 비로소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이제 100일간의 일기는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가 되었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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