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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01808 / 퀴어] 삶을 이해하는 것 by 에일레스

 

아마도 중학생 무렵부터, 처음으로 퀴어 장르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 같다. 그때는 퀴어라는 말도 몰랐다. 요새는 BL이라는 표현도 많이 쓰지만, 그때는 다들 야오이라고 불렀다. 만화를 좀 보거나, 영화를 좀 보는 또래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몇몇 유명한 만화 or 영화 작품들의 이름이 돌았다. 일부는 나도 찾아서 보기도 했다. 소설을 처음 끼적이기 시작했던 것도 그때쯤인데, 중 3때 처음으로 완결지어 쓴 소설이 당연하게도(?) 동성애 장르였다. 그걸 반 아이들에게 돌려 읽히기도 하던 시절이 있었다.. ㅋㅋ

 

그때는 정말 호기심에서 그 장르를 찾아봤던 것 같다. 그냥 이성간의 사랑 얘기보다 좀 더 자극적이라는 느낌에서? 여전히 그 장르를 파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는 전처럼 일부러 찾아보거나 하지는 않게 됐다. 그러니까 '퀴어 장르라서' 일부러 보진 않는다는 얘기다. 뭐랄까, 그 장르를 지나치게 특별하게 취급하는 것 자체가 이제는 좀 이상하게 생각된다.

 

거기에 큰 영향을 주게 된 작품이 아마 이것이 아닐까 싶다.

 

 

(스포일러 있음)

 

 

 

메종 드 히미코 (La Maison De Himiko, 2005)

네티즌 8.49(1,573)
기자·평론가 6.75(4) 평점주기
개요 드라마 2006.01.26 개봉 130분 일본 15세 관람가
감독 이누도 잇신
관객수 89,123명

 

 

페인트 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직원인 사오리에게 어느날 한 남자가 찾아온다. 그는 어린 사오리와 어머니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의 젊은 게이 애인, 하루히코였다. 사오리의 아버지는 긴자에서 유명한 게이바를 하던 마담이었고, 게이바가 문을 닫은 후에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게이를 위한 양로원을 짓고 살고 있었다. 아버지의 현재 이름인 '히미코'에서 이름을 딴, '메종 드 히미코(히미코의 집)'이 바로 그 곳이다. 하루히코는 사오리의 아버지가 암투병 중임을 알리지만 사오리는 그를 냉대한다. 그러자 하루히코는 메종 드 히미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걸로 제안을 한다. 돈이 필요하던 중에 높은 일당과 아버지의 유산 얘기에 마음이 흔들린 사오리는 곧 매주 일요일마다 메종 드 히미코를 찾게 된다.

 

 

 

 

사오리는 게이로의 삶을 선택하며 자신과 어머니를 떠난 아버지를 원망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같은 다른 게이들 역시 혐오한다. 사오리는 뚱한 얼굴로 일을 하고, 굳이 게이 노인들에게 친절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빚에 대해 묻는 게이 노인 루비의 질문에 사오리는 뒤에 있던 아버지 히미코가 들으라는 듯 사정을 담담히 말한다.

 

 

 

 

 

그런 사오리도 점차 메종 드 히미코의 게이 노인들과 가까워진다. 그것은 몇 개의 에피소드로 이어지는데, 그 첫번째가 이것이다. 루비는 젊어서 결혼한 적이 있었고, 그렇게 얻은 아들이 손녀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처로부터 들은 바 있었다. 전처의 사망 후 더이상 소식을 들을 수 없던 차에, 손녀로 추정되는 사람으로부터 '피키피키 피키' 라고 적힌 엽서를 받고 있어서 그 동작을 사오리에게 가르쳐달라고 부탁한다. 사오리는 그 대가로 돈을 받긴 하지만 (ㅋㅋ) 성심성의껏 동작을 가르쳐준다.

 

 

 

 

두번째는 야마자키와의 일이다. 야마자키는 드레스를 입고 싶지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고이 모셔놓기만 하던 사람인데, 사오리는 그를 위로하면서 여자도 아무 옷이나 다 입지는 못한다고 말해준다. 그러자 야마자키는 사오리에게 선물이라며 이런저런 코스튬을 사서 같이 입으며 노는 시간을 가진다. 사오리는 흥이 난 김에 곱게 드레스를 입은 야마자키와 메종 드 히미코 사람들과 함께 나이트클럽으로 놀러 가는데, 거기서 야마자키는 예전 직장동료를 마주친다. 예전 직장동료의 폭언에 야마자키가 충격을 받자 사오리는 그를 대신해 사과하라며 화를 낸다. 사오리가 이쯤에서는 어느 정도 메종 드 히미코의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리고 사오리는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게 된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어머니가 사실은 가끔 아버지를 찾아가 만났다는 것, 둘은 계속 좋은 사이를 유지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삶을 이해했다. 어쩌면 그것이 어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함께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멀어질 수도 없는 사랑.

사오리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이와 같은 것이 사오리와 하루히코의 관계에서 다시 나타난다. 둘은 외로움에 대한 정서를 공유하며 교감하고 서로에게 조금씩 끌리는 마음을 갖는다. 하루히코는 사오리와 관계를 시도하기도 하지만, 끝내 성적 지향의 벽을 넘지 못한다. 사오리에게 이것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이해하게 되는 차원의 이야기가 된다.

 

사오리는 어머니의 이름을 빌어 아버지에게 화를 내 왔지만, 이제 사오리 스스로 아버지에게 묻는다. 자신을 사랑했었냐고. 아버지는 가정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고, 그에 대한 미안한 마음 역시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나 사오리에 대한 마음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히미코는 아주 어렵게 표현한다.

"나는 너를 참 좋아한단다."

부녀의 화해가 극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느낄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알 수 있는 화해 장면이다.

 

 

 

 

이 영화는 나름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메종 드 히미코를 떠났던 사오리는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간다. 사오리를 그리워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로. 이제 사오리는 전처럼 그들을 혐오하거나 증오하지 않는다. 이 결말은 다소 지나친 낭만으로 비춰보이기도 한다. 메종 드 히미코 바깥의 현실은 여전히 그들을 냉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또 벽에다 혐오 문장을 찍찍 써놓을 것이고, 짓궃은 동네 꼬맹이들은 또 물풍선을 던지거나 화약을 터뜨릴 것이다. 앞집 사는 할머니는 눈만 마주쳐도 더럽다는 듯 문을 쿵 닫아버릴 것이고, 그 외에도 더 많은 슬픈 일들이 그들에게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 속에서만큼은, 평화로운 시간들 속에서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보통 사람처럼 하고싶은 일들을 하면서, 서로 이해받으며 지내기를 응원하고 싶어진다. 

그런 마음을 들게 하는 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