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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01807 / 얼음] 아름다운 얼음의 강 위에서 by 에일레스

 

한 남자가 잠에서 깨어난다. 아침이다. 남자는 여느 때처럼 출근을 한다. 아니.. 좀 다르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남자는 회사를 땡땡이치고 원래 타야하는 기차 반대편 플랫폼으로 달려가 막 떠나는 열차에 몸을 싣는다. 남자가 도착한 곳은 몬타우크. 눈이 하얗게 내린 겨울 바닷가다.

거기서 남자는 한 여자를 본다. 자기처럼 혼자 몬타우크의 겨울 바다를 찾아온 여자였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남자는 또 다시 그 여자를 만난다.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말을 붙여온다. 남자의 이름은 조엘, 여자의 이름은 클레멘타인이다. 둘은 왠지 모를 끌림을 느낀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에게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청하고, 클레멘타인은 집 앞에 온 조엘을 안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한다. 둘은 술 한잔씩 하면서 대화를 나눈다. 집으로 돌아가는 조엘에게 클레멘타인은 전화번호를 적어주고, 집에 도착한 조엘은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어 통화한다. 둘은 다음날 밤 다시 만나기로 하고, 클레멘타인은 조엘을 찰스 강으로 데려간다.

 

 

 

 

아름다운 겨울 밤에, 아름답게 얼어붙은 찰스 강 위에 나란히 누워, 두 사람은 별을 바라보고 얘기를 나눈다. 그렇게 특별한 대화가 아닌데도 둘은 즐거워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강에서 밤이 지나 아침이 되고,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다시 집까지 데려다준다.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집에 가도 되냐고 묻고, 칫솔을 가져오겠다며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기다리는데, 어떤 낯선 남자가 조엘의 차창을 두드린다. 낯선 남자가 조엘에게 묻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Can I help you?)" 그리고 또 묻는다. "여기서 뭐하고 있어요?(What are you doing here?)" 조엘은 영문을 몰라하고, 남자는 급히 자리를 뜬다.

여기까지가 이 영화의 오프닝이다.

 

 

(스포일러 있음)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관람객 9.26(946)
기자·평론가 8.45(5) 평점주기
개요 멜로/로맨스, 드라마2005.11.10 개봉107분미국15세 관람가
감독 미셸 공드리

 

 

언젠가 내가 사모은 DVD, 블루레이 목록을 주욱 보다가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내 리스트에는 '로맨스' 장르가 절대적으로 적다는 것..!

생각해보니 그럴 수 밖에 없긴 했다. 나는 로맨스 장르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좋아하는 스릴러 영화나 액션 영화를 꼽으라면 몇 편이나 말할 수 있지만, 로맨스 영화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별로 본 게 없기도 하고, 별로 안 땡겼으니까 안 봤기도 하고..

그리고 그 한정된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 목록의 가장 위쪽에, 바로 이 영화가 있다.

 

이 영화의 매력은 첫번째로 그 독특한 소재에 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라쿠나 사'라는 회사가 등장하는데, 이 회사는 이른바 '기억을 지워주는' 기술을 가진 곳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사실 2년간 사귀어온 사이였고,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다투다가 조엘이 폭언을 해버려서 클레멘타인이 크게 상처를 받은 상태였다. 클레멘타인은 라쿠나 사에서 조엘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렸고, 화해를 하러 클레멘타인을 찾아갔던 조엘은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클레멘타인이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마찬가지로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로 한다.

라쿠나 사의 직원들이 잠든 조엘의 집에 찾아와 그의 기억을 지우는 작업을 하는 동안, 영화는 최근 시간으로부터 역순으로 조엘의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이 지워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조엘의 기억 속에서 조엘이 겪은 일들이 다시 보여지는데, 점점 건물이나 배경이 무너지거나 없어지고 인물들의 얼굴이 뭉개지는 방식으로 기억이 지워지는 것을 표현한다. 이 부분의 묘사는 꽤나 참신하고 감각적이라 더 매력이 있다.

 

이 영화의 두번째 매력은 사람들이 겪는 연애에 대한 감각을 잘 살려낸 부분이다. 기억을 지우기 전의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관계는 좋은 것보다 다툼이 더 많은 상태였다. 그리고 시간이 역순으로 흘러가면서 둘이 정말 좋았던 순간들이 다시 조명된다. 서로 너무나 사랑하던, 같이 웃고 떠들고 장난치던 모습들. 그냥 지워버리기엔 너무나 아름답고 행복했던 기억이다. 조엘은 기억을 지우는 것을 멈춰달라고 외치지만 현실 속 조엘은 깊이 잠든 상태일 뿐이다.

기억은 착착 지워져가고, 조엘은 기억 속에서 만난 기억 속의 클레멘타인에게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한다. 처음 만났을 때의 끌림까지 모두 다.

공일오비의 노래 가사처럼, 처음에 만난 그 느낌과 설레임을 잊지 않는다면 어떤 연인도 서로에게 싫증을 느낄 일이 없겠지만, 인간의 감정이 어디 그러하겠는가. 그렇지만 그 사랑은 분명 존재했고, 사랑의 기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 사랑은 진짜였다. 기억 속의 조엘은 그것을 깨닫는다. 너무 늦었지만 말이다.

 

위에 언급한, 찰스 강에 가서 얼음 위에 누워 하늘을 보는 것은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이전에도 같이 경험한 일이었다. 클레멘타인은 겨울의 얼어붙은 강에 가서 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했고, 특히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이 아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고 싶어하는 감정이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같이 공감한다는 건 정말 특별한 일이기도 하다.

조엘이 처음 클레멘타인과 찰스 강에 가서 얼음 위에 누웠을 때, 조엘은 클레멘타인에게 평생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며 너무나 행복하다고 고백했었다. 기억을 지운 후 클레멘타인은 불안정한 심리에 시달리다가 다른 사람과 다시 그 강에 가서 똑같은 경험을 한다. 그 다른 사람이란 라쿠나 사의 직원인 패트릭으로, 클레멘타인에게 반해서 그녀의 자료를 몰래 빼돌려 그녀에게 접근한 남자였다. (오프닝 장면에서 기억을 지운 후의 조엘에게 여기에서 뭐하고 있냐고 물은, 바로 그 사람이다.) 패트릭은 클레멘타인의 메모 속에 있던, 강 위에서 조엘에게 들었던 말과 똑같은 말을 그대로 읊는다. 그러나 클레멘타인은 조엘 때와는 다르게 전혀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인 것이다.

 

내가 특히 흥미롭게 본 부분은 조엘의 기억 속 클레멘타인의 모습이었다.

클레멘타인은 머리카락을 녹색이나 빨강색, 오렌지색, 파랑색 등등 좀 요란한 컬러로 염색한, 튀는 외모와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진 여자다. 조금 소심하고 착실한 스타일의 조엘과는 사실 정반대 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조엘은 라쿠나 사에서 기억을 지우기 전 클레멘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교양이 없다(not educated)'고 표현한다. 책에 대해서 얘기를 나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어휘가 틀려서 가끔 공공장소에서 좀 창피했다고 말이다.

그런데 조엘의 기억에 등장하는 클레멘타인은 조엘이 말한 것과는 좀 다르다. 외모나 성격은 그대로지만, 조엘이 기억 속에서 당황하면서 도망쳐야 한다고 말할 때 클레멘타인이 방향을 제시해주고 이끌어주는 것으로 나온다. 조엘의 기억에 등장하는 클레멘타인은 조엘이 '본' 클레멘타인이면서 조엘이 '아는' 클레멘타인이다. 조엘에게 클레멘타인은 사실 그렇게 교양없고 무식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기억을 지우기 전, 완전한 헤어짐을 눈 앞에 둔 조엘이 그저 실제 마음보다 모질게 말했을 뿐이었다.

클레멘타인 역시, 라쿠나 사의 녹음테잎에서 그녀는 조엘이 너무 지루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클레멘타인은 별것도 아닌 조엘의 별자리 이야기에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모질어질 때 얼마나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매력은, 지금에 와서 비로소 느껴진 거지만,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연애의 모습이다.

영화 속 배경 시간은 2003년 발렌타인데이 전후이다. 그 시절엔 아직 스마트폰이 나오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휴대폰도 많이 보급되기 전이다. (한국은 2000년대 초반에 매우 빠른 속도로 휴대폰이 보급됐지만 외국은 그렇진 않았다고 알고있다) 휴대폰이 없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집전화로 통화하고, 조엘은 노트에 일기를 쓴다. 둘은 주고받았던 대화를 그림으로 그리고, 손으로 쓴 카드를 주고받는다. 사진은 인화하여 벽에 붙여놓는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무렵엔 그다지 특별해보이지 않던 것들이었다. 그땐 다 그랬으니까. 그러나 많은 시간이 흘렀고, 이제 온통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다시 돌아본 그 아날로그한 것들이 새삼 사랑스럽게 보였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이 영화의 이런 부분은 점점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겠지.

 

 

 

 

영화의 마지막. 라쿠나 사에서 일하던 메리가 기억을 지운 이들에게 각자의 자료들을 보내버림으로서 자신들의 관계에 대한 지워진 기억을 알게 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혼란스러워 한다. 떠나려는 클레멘타인을 조엘이 붙잡는다.

 

 

 

 

둘은 다시 시작을 준비한다. 이미 둘은 한번의 끝을 경험했다. 둘의 관계는 또 다시 끝을 향해 갈 수도 있다. 결말을 알면서도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할 수 있을까? 영화 <컨택트>에서도 똑같은 질문이 던져졌었다. 그리고 그 영화에서도 주인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한다..

 

난 이 부분에서 늘 생각에 빠진다. 나라면 시작할 수 있을까. 아직 나는 긍정적인 답이 안 나온다. 

내가 아직 사랑을 잘 모르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