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8년

[201812 / 눈] 첫눈빵배 첫눈빵 by 란테곰. 헉헉헉. 평소엔 바라보기만 했던 동네의 오르막길을 끝까지 뛰어오른 나는 전봇대에 기대 숨을 고르고 있었다. 터질 것 같은 허벅지를 손으로 두드리면서도 연신 좌우로 고개를 돌려 쫓아오는 사람이 있는지 살폈다. 앞으로 15분만 더 도망가면 된다. 딱 15분만. ’첫눈빵배 첫눈빵‘이라는 이름을 지었을 때는 그저 단순한 놀이로 생각한 것이었다. 고려 시절 첫눈을 선물해주면 첫눈을 받은 사람은 술이든 밥이든 이른바 ’첫눈빵‘을 샀다는 풍습에 더해 그 상품을 대전 유명한 빵집의 첫눈빵으로 끼얹어본 것이었다. 우리 동네는 첫눈이 늦어 이제야 시작하게 되었지만 이미 진행한 많은 동네들에선 첫눈이 묻은 편지를 상대편 집으로 보낸 '퀵빵'은 물론이요 새벽에 상대편 집 마당에 편지를 놓아두고 밤새 기다렸다가 다음 날 아침 .. 더보기
[201812 / 눈] 보이지 않는 사랑 by 에일레스 루벤은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와 함께 사는, 시각장애인 청년이다.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은 그는 난폭하기가 그지없어 매일같이 고용인들과 어머니를 괴롭힌다. 어느날 어머니는 루벤을 위해 그에게 책을 읽어줄 사람을 고용하고, 그렇게 마리가 루벤의 집으로 온다. 마리는 어린 시절의 학대로 인해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 심한 흉터가 남아있는, 30대 중후반 쯤 되는 여성이다. 마리는 난동을 부리는 루벤을 완력으로 제압하고, 처음엔 당황해하던 루벤은 서서히 마리에게 관심을 가진다. (이 글에는 영화의 내용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블라인드 (Blind, 2007) 개요 드라마, 멜로/로맨스 98분 네덜란드 외 감독 타마르 반 덴 도프 출연 요런 셀데슬라흐츠, 핼리너 레인, 카테리네 베르베케, ... 는 독특한 사랑 이야.. 더보기
[201812 / 눈] Fucking idiot by 김교주 사람의 몸이 만금이라면 눈은 9천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정확한 표현은 기억 안 나지만 대충 저렇다는 얘기다. 그만큼 눈이, 시각이 사람의 오감 중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이야기인 걸로 이해하면 그걸로 족하다. 그리고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눈을 잃은 한 남자의 이야기. 그리고 그가 잃었던 눈을 다시 찾는 이야기. 그가 아내를 잃은 것은 맹인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맹인이었는데도 어여쁜(! ) 아내를 가진 사내였다고 해야 맞다. 그 아내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그런데 그는 예쁜 아내는 가졌지만 그녀를 부양할 만한 능력은 없었던 인간임에 분명하다. 아내가 죽은 뒤, 기댈 데라고는 자기밖에 없는 어린 딸에게 그가 한 짓들을 생각하면 그런 의심은 더 심화된다. 그는 .. 더보기
[201811 / 젓가락] 교정, 틀어지거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음 by 란테곰. 유년기 시절,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곧 교정도 따라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연필을 처음 잡은 날, 칼질을 처음 해본 날, 기타 수많은 '처음' 은 즐거움보다는 답답함이 많았다. 왼손으로 글씨를 쓰면 안 된다며 굳이 불편한 오른손으로 연필을 잡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칼질도 왜 오른손으로 해야 하는지 부모님은 제대로 설명해주시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하면 어디 가서 못 배웠다는 얘기 듣는다' 가 전부였다. 그런 교정의 최고봉은 식사 시간이었다. 젓가락질을 처음 시작하게 되었을 적, 내 젓가락질을 지켜보시던 부모님의 표정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하루 세 번 반드시 거치는 일이고 또 피할 수도 없는 일. 같이 식사를 하는 어른들 중 누군가가 기분이 좋지 않다 싶으면 그 날의 식사 시간은 그저 가시방석.. 더보기
[201811 / 젓가락] 젓가락이 시옷 받침인게 그렇게 중요한가 by 에일레스 1983년, 국문과 학생인 인우는 어느 비오는 날 우산으로 뛰어들어온 여자 태희를 만난다. 태희와 인우는 열렬한 사랑에 빠지지만, 인우의 군입대를 앞두고 갑자기 태희가 사라져버린다. 2000년,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자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서 살고 있는 인우는 어쩐지 태희를 연상시키는 한 사람을 만난다. 태희의 작은 습관부터 태희가 했던 말, 태희의 소지품까지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은.. 하필이면 인우가 가르치는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 현빈. 인우는 겉잡을 수 없는 혼란과 다시 피어나는 사랑의 감정에 괴로워한다. 번지 점프를 하다 (Bungee Jumping Of Their Own, 2000) 네티즌 8.99 (2,333) 평점주기 개요 멜로/로맨스 2001.02.03. 개봉 101분 한국 15세 관람가 .. 더보기
[201811 / 젓가락] 젓가락은 어떻게 동아시아를 지배했는가 by 김교주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내 젓가락질은 무척 어설펐지만 부모님은 한 번도 교정 시도를 하지 않으셨다. 어느 날 가족 중에 나만 이상한 젓가락질을 하고 있음을 깨달은 나는 독학 끝에 제대로 된 젓가락질에 성공했고 그건 스물이 다 되어서였으니 퍽이나 늦은 축이었다(당연한 말이지만 교정을 딱히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던-것 같은- 내 부모님은 내가 젓가락질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전혀 놀라지 않으셨다. 지금까지도 어머니는 내가 그렇게 늦게까지 젓가락질이 이상했다는 점을 모르신다). 늦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나는 이것저것을 젓가락으로 집어올리는 데에 재미를 붙였다. 메추리알 장조림, 참깨, 들깨, 쌀알이나 콩 같은 것들. 물론 그런 재미는 곧 사라져서 얼마 후에는 마치 처음부터 젓가락질을.. 더보기
[201810 / 게으름] 발췌독의 위험함 by 김교주 독서의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한다). 뜻을 생각하며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읽는 정독 한 권의 책을 끊이지 않고 처음부터 쭈욱 읽는 통독 왕창(?)읽는 다독 그리고 지금 이야기하려는 건 발췌독 이다. 사람이 발췌독을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일 거다. 지도나 사전 같은, 발췌독을 할 수 밖에 없는 책을 읽기 때문(물론 가끔 사전을 A부터 Z까지 순서대로 외우는 놈들도 있지만 그런 애들은 예외로 하고)이거나, 이번 달 우리의 주제에 맞게 게으르기 때문이거나. 그리고 나는 최근에, 군신처럼, 트위터에서(ㅎㅎ) 발췌(독)의 위험함을 알았다. 트위터에는 봇, 이라는 게 있다. 다수의 트위터리언이 하는 것처럼 자기 일상을 공유하거나 사진을 올리거나 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로봇처럼, 한 가지 테마에 대해서 .. 더보기
[201810 / 게으름] 게으른 관심 by 에일레스 몇달 전 어느날. 트위터에 갑자기 '여성 서사'가 트렌드로 떠오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시간을 기점으로 바로 어제(10월 30일)에도, 또 '여성 서사'가 트렌드에 올랐다. 전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패턴은 동일했다. 여성 서사를 주제로 한 작품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 여성 서사를 많이 봐줘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 여성 서사 작품에 관심은 있지만 수가 너무 적어서 찾기 힘들고 심지어는 여성 서사가 재미가 없어서 볼 것이 없다는 의견이 나온다 - 거기에 사람들이 반박한다 - 다시 반박한다 - 또 반박한다.. 이 트렌드를 보고 사실 나도 트위터에 말을 보탰었다. 오늘 쓰려고 하는 글은 그래서 사실 그때 트위터에 썼던 글을 풀어서 쓰는 거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최근에 영화 이 개봉하.. 더보기
[201810 / 게으름] 복사해서 붙여넣기 by 란테곰 수요일 차 두 대가 동시에 지나가려면 서로 어깨를 한껏 움츠려야만 될 것 같은 좁은 이차로에 횡단보도가 있었다. 난 신호를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다 맞은 편에 서있는 아이를 보게 되었다. 하얀 운동화에 얇은 다리를 감싸듯 딱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커다란 하얀 후드티를 걸친 여자아이였다. 찹쌀떡 저리 가랄 정도로 분칠한 하얀 얼굴에 쥐잡아먹은 듯 빨간 입술. 저기에 롱패딩만 더하면 김치김밥이지. 라고 마음의 소리를 흘려보내며 킥킥 웃었다. 신호가 바뀌고 나와 여자아이는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자아이는 달려오던 차에 치어 내 눈 앞에서 사라졌다. 목요일 차 두 대가 동시에 지나가려면 서로 어깨를 한껏 움츠려야만 될 것 같은 좁은 이차로에 횡단보도가 있었다. 난 신호를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다 맞은.. 더보기
[201809 / 온도] 동지애와 무용담 by 란테곰 올 여름이 정말 덥긴 더웠나보다. 추석을 맞아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 사이에서도 안부 다음으로 묻는 것이 올 여름을 어찌 났느냐였다. 아무리 평소 가깝게 지내고 명절 때마다 서로 반기는 친척 지간이라도 오랜만에 마주쳤을 땐 아주 약간의 어색함이 있기 마련인데, 여름 얘기를 꺼내자마자 어색함은 눈 녹듯 사라지고 동지애가 뿜뿜 터졌다. 사춘기에 들어서 말 한 마디 않던 십대 조카부터 칠십대 큰아버님까지, 자기가 견뎌낸 모든 여름 중 올해 여름이 제일 더웠고 힘들었다고 입을 모아 얘길 했다. 전기세를 어마어마하게 냈네, 우린 에어컨이 있어도 켜질 못했네 등등 수많은 무용담도 쏟아졌다. 되돌아보면 참으로 지긋지긋한 여름이었다. 두어달 가까운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든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