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 / 진실] 조금이라는 단어에 관한 정의. by 란테곰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동아리가 매우 활성화된 학교였기에 매년 3월이 되면 각 동아리의 부장들이 1학년 교실을 돌며 동아리를 홍보하는 것이 관습화되어 있었다. 내게 입질이 왔던 동아리는 '교지편집부' 라는 매우 그럴듯한 이름을 가진 동아리. 동아리 소개를 위해 찾아온 선배의 말을 빌자면 실질적인 활동은 축제 때 찾아온 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한 인터뷰 및 사진 촬영 등이 90% 정도인 매우 멋진 동아리였다. 거기에다 - 비록 CA 시간 및 사전 준비를 위한 회의가 있을 때만 사용이 가능했지만 - 전용 부실(!)이 있고, 10시까지 진행되던 자율학습 시간에 수다를 떨고 과자를 주워먹으며 유유자적하는 것이 합법적(?)으로 허락된 '회의'를 2주일에 한 번씩 갖는다는 말엔 실로 흥분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여학교와의 교류도 있다는 말에 더더욱. 무엇보다도, 2학년 선배들의 '여름방학부터 준비하면 된다'는 말에 '그럼 1학기는 꿀 빨겠구나' 싶었던 귀얇은 1학년인 나는 그저 기쁜 마음으로 그 일탈을 만끽하기 위해 가입을 서둘렀었다. 선배가 흘리듯 말했던 '축제 지나고 조금 바빠진다' 는 말은 이미 귓가에서 흘려보낸지 오래였다.
선배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1학기엔 거의 소집이 없었으나 여름방학을 맞아 학교 측에서 준비한 '보충수업 + 자율학습' 캄보에 좌절하던 무리들 사이에서 우리는 자주 젖과 꿀같은 '회의'를 가졌는데, 그 회의의 주된 안건은 언제나 '아마 가을쯤 축제가 있을텐데, 그 때 타학교에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어떤 것들을 질문할지 정하고, 교내에선 각종 동아리가 활동하는 모습을 잘 찍고 정리하자' 는 굉장히 뻔하디 뻔한 이야기였다. 당연히 짧게 끝날 수밖에 없는 '회의' 가 마무리되면 우린 부실에서 각자 할 일에 매진했는데, 할 일에 매진하기 직전 각자 큰 대야를 꺼내 우루루 화장실로 몰려가 대야 한 가득 찬물을 받아와선 발을 풍덩 담가놓곤 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50명이 넘게 들어찬 교실에서 선풍기 꼴랑 네 개로 버텨내는 친구들에 비해 훨씬 윤택한 여름을 보냈다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2학기 중간고사를 마무리짓자마자 '회의'는 잦아지고 또 본격화되었다. 물론 같은 주제에 관해 논의하고 같은 결말을 도출한 것까진 같았으나, 그간 선배들이 만들었던 교지를 훑어보며 '우리도 이런 것은 넣자' 등등의 이야기도 나누는 등 전보단 훨씬 바람직한 내용의 회의가 많았다. 잦은 '회의'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에 대한 기쁨이 압도적이었지만, 그 와중에 '와, 이게 진짜 동아리구나' 싶어 내심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그렇게 준비를 하던 중 드디어 축제가 시작되었다. 교류(!) 대상인 여고 학생들과 계면쩍은 인사를 나누고, 축제 구경온 타학교 여학생들 인터뷰도 하고, 사진도 찍고, 틈틈히 밥도 얻어먹고, 술(!)도 얻어마셨다.
하지만 그렇게 즐거운 축제를 보내고 난 뒤에 내게 찾아온 것은 절망이었다. 늦어도 12월엔 탈고가 되어야 할 200페이지 전후의 책 한 권에 들어갈 내용 중 축제에 관한 부분은 고작해야 10페이지 정도만 채울 수 있었고, 교가, 선생님들 사진, 교장선생님 말씀, 목차, 후기 등등을 제하더라도 나머지 150여 페이지를 위해 준비해야 되는 것들에 대해 우리 중 그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이런 것은 넣자' 며 얘길 했던 부분은 고작해야 10여페이지에 불과했고, 설상가상으로 담당선생님이 축제 당시에 인터뷰했던 내용을 퍼센테지로 환산해 엑셀로 그래프를 만들어 넣자고 말씀하셔서 우리를 더욱 당황케했다. 다행히 엑셀을 잘 쓰는 친구가 하나 있어 그래프를 만드는 문제 자체는 해결되었지만, 우리의 인터뷰는 녹음 방식으로 진행되었기에 전부 내용을 확인해가며 체크해야한다는 문제점이 대두되었다. 특히, 축제 중 우리가 인터뷰했던 인원이 대략 150명 정도였다는 것에 우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있나. 결국 '10페이지를 위한' 노가다가 시작되었다. 열 명이 듣고 체크하고 듣고 체크하고를 계속 반복해 쌓아올린 결과를 엑셀로 뚝딱뚝딱 그려내는 것까지 딱 1주일이 걸렸다. 하지만 그 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교지에 들어갈 내용을 채우기 위해 문학선생님을 찾아가 문학시간에 학생들이 써냈던 글 중 잘 되었다고 느끼신 글들을 추려달라 부탁드려 받아낸 400자 원고지는 대략 100장을 훌쩍 넘어갔고, 그 중에서 다시 괜찮은 글들을 추려내 워드로 옮겨적는 일이 내게 주어졌기에 저녁 식사 이후 교무실로 달려가 10시까지 한글만 붙들고 늘어지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자율학습을 감독하시는 선생님들의 '넌 뭔데 빠지냐'는 눈치 혹은 핀잔과 함께하는 교무실에서의 워드 작업은 참으로 가시방석이었다. 그 때 당시 책상에 플라스틱을 대고 책상 아래에 모니터를 놓는 방식이 유행이라 하루에 네 시간을 고개를 숙인 채 작업을 해야 했는데, 목이 아파 고개를 한 번씩 돌리가며 풀려 치면 '야자 빠졌으니 이거라도 열심히 해라' 는 질타가 쏟아졌다. 거기에다 그나마 열심히 쳐낸 것들엔 오탈자가 많아 많은 수정 작업을 거쳐야 했는데, 검수을 위해 인쇄를 할 때마다 선생님들의 'A4지 아까우니 한 번에 잘 쳐서 뽑아라' 는 말씀을 하실 적엔 진짜 볼이 부어 입을 삐죽 내밀고 키보드를 두들기곤 했다. 다행히 나는 그나마 나은 축이었는 것이, 엑셀 1명, 한글로 단순 입력 1명, 수식등을 활용하는 한글 입력에 1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교지 내용을 채우기 위해 직접 글을 쓰거나 야자시간을 빌어 수능이 채 백일도 남지 않은 예민꾸럭지 집단인 3학년 선배들의 교실을 돌며 설문 조사를 하고 다녔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선선하던 날씨는 곧 날을 세운 듯한 바람과 함께 추워졌지만 난 여전히 교무실에서 저녁을 보냈어야 했다. 왜냐. - 예민꾸럭지들의 각종 욕설에 시달려가며 준비한 - 설문조사가 마무리되면 그 내용을 내가 옮겨적어야 했고, 누군가가 글을 쓰면 그것 역시 내가 옮겨적어야 했고, 담당 선생님이 어디선가 구해온 '선배가 쓴' 단편소설까지도 내가 옮겨적어야 했으니. 이래저래 옮겨적을 것이 많았지만 그 중 압권은 뭐니뭐니해도 단편소설이었는데, 대략 조선 시대에 있었던 일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 선배의 글은 참 재밌었으나 너무나도 많은 한자 주석이 날 환장하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바짝 숙인 채로 대략 A4 20여장 정도 되는 글의 1/3을 차지하는 한자를 200자 원고지에 흘려쓴 것을 보며 일일히 찾는 일은 제대로 스트레스였고, 검수 과정에서 오탈자가 많이 발견되어 담당선생님께 깨질 때마다 난 한자마저 흘려쓴 선배를 원망하게 되었다. 언젠가 하루는 한 페이지에서 무려 열 다섯개의 오탈자가 발견되어 선생님께 제대로 한 소리를 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난 그 때 처음으로 '축제 이후에 좀 바빠진다' 는 선배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은 자신에 대한 책망을 함과 동시에 과연 어느 정도까지 좀이라는 표현 안에 포함 될 수 있는 것인지 확실히 물어봤어야 했다는 생각을 하고, 내가 이 고생을 또 할 필요는 없으니 내년엔 기어코 동아리를 옮기겠노라며 터덜터덜 교무실로 돌아오다 다른 친구들은 뭘하나 싶어 살짝 훑어본 부실에선 나머지 인원이 담당 선생님의 따가운 눈초리를 뒷통수로 맞아가는 살벌한 분위기에서 뭔가를 쓰느라 분주한 것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그 결과물들은 또 내게 돌아왔다.
드디어 12월이 되었고, 물 말은 밥을 후루룩 마시듯 기말고사를 말아먹은 우리의 노력에 힘입어 교지는 무사히 탈고되었다. 다행히 친구들과 선생님, 그리고 타 학교에서의 평이 괜찮아서 안심이었다. 그리고, 한참 바쁠 때 생각했던 다른 동아리로 넘어가려는 계획은 담당선생님의 권유 아닌 권유로 인해 내가 부장 자리에 앉게 되며 물거품이 되었다.
3월, 신입생들이 들어오고, 각 동아리의 부장들과 함께 야자 시간에 1학년 교실을 돌며 간단하게 동아리 홍보를 하게 되었다. 과연 어떻게 홍보를 해야 아이들이 솔깃해할지를 한참 고민하다 나온 답을 들고선 유유히 1학년 1반 교실에 들어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교지편집부의 실질적인 활동은 축제에 찾아온 타학교생, 특히 여학생들에 대한 인터뷰 등이 90%다. 물론 여고와의 교류도 있지. 축제 때 찾아온 여학생들에게 교지편집부라 하면 모두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해줄테니 각자 알아서 잘 해봐라. 그리고, 비록 회의가 있을 때에만 사용할 수 있지만 나름 전용 부실이 있다. 거기에다 회의는 야자시간에 하지. 회의 중엔 담당선생님도, 야자 감독 선생님도 들어오질 않으신다. 축제 지나고 나면 조금 바빠지긴 하는데... 아까 말했듯 축제 지나고 하는게 90%니까 다른 동아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간은 널널하그든. 그러니 잘 생각해보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