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 / 커피] 남자와 여자 by 란테곰.
남자는 커피를 매우 즐겼다. 하지만 커피 전문점의 커피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남자가 즐겨마시는 커피는 오로지 믹스커피였다. 밥을 먹고 나서든 잠시 한숨 돌릴때든 늘 믹스커피가 함께 했다. 여자는 믹스커피향에 어우러지는 담배 연기를 즐겼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남자였지만 직장동료가 담배를 피우러 나갈 적엔 어김없이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를 들고 함께 흡연구역으로 향했다. 일부러 담배를 피우는 사람 곁으로 찾아와 커피를 마시는 남자를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은 다소 꼬여있었다. 담배를 안 피우면서도 학연 지연 흡연이 중요한 사회생활을 잘 한다며 비아냥대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남자가 믹스커피만을 마시게 된 것은, 그리고 담배 연기와 어우러진 커피를 즐기게 된 것은 전에 만난 한 여자의 영향이었다. 남자가 전에 만났던 여자는 오로지 믹스커피만 마셨다. 남자와 여자가 두 번째로 만났을 적에 여자는 남자를 데리고 동네 허름한 중국집에 가 짜장면을 먹고 난 뒤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웠다. 그날은 남자와 여자가 처음으로 입을 맞춘 날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가 재떨이를 먹었나 의심하는 것으로 여자와의 첫키스를 기억했다.
여자는 남자와 만난 뒤 얼마 되지 않아 싸구려 중고차를 구했다. 동네 아는 사람에게 16만키로 달린 차를 거저나 다름없이 얻었다고 했다. 남자의 집앞까지 차를 끌고 온 여자는 차를 넘겨받는데 든 돈보다 정비 비용이 더 들었다며 투덜대면서도 입이 귀에 걸려있었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기분을 헤아려 아무런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지만 처음 문을 열고 들어선 차 안에서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담배냄새가 짙게 배어있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보온병을 여자에게 내밀었다. 내용물이 얼음을 넣어 차갑게 식혀온 믹스커피를 확인한 여자는 세상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커피를 마셨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며 이 여자가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담배 냄새가 짙게 배인 차 안에서 얼핏 흘러나오는 믹스커피의 달달한 향이 뿜어내는 존재감이 생각보다 크다고 느꼈다. 그 날부터 남자는 담배냄새 옆에서 믹스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처음 여자의 집에 찾아갔던 날, 남자는 깜짝 놀랐다. 여자의 조그마한 원룸엔 침대 틀 없는 허름한 매트리스와 정수기, 낡은 좌식 책상이 가구의 전부였다. 남은 빈자리는 전부 담배냄새가 꾸역꾸역 채우고 있었다. 매트리스 위엔 커다란 창문이 있었는데 까만 시트지를 대충 잘라 붙여 창문 한쪽을 전부 열어놓은 한낮에도 동굴같은 느낌이었다. 심지어 전깃불도 들어오질 않았다. 여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남자에게 매트리스에 앉기를 권했다. 남자는 담배냄새에 찌들은 매트리스 위를 조심스레 살피다 볕이 들어오는 쪽에 앉았다. 그리고 여기가 여자와의 첫 잠자리가 되진 않기를 하늘에 빌었다. 여자는 정수기로 가 커피를 두 잔 타와 남자에게 내밀고는 남자의 옆에 앉았다. 커피 마실 때마다 물 끓이기가 귀찮아서 정수기는 어쩔 수 없이 달았다는 이야기를 하다 여자는 갑자기 매트리스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아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남자의 볼을 턱선을 향해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남자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런지 후광이 비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남자는 역광이라 내 얼굴이 안 보였을텐데 라고 잠깐 생각했지만 이의를 제기하진 않았다. 남자의 손도 여자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남자가 하늘에 전한 바람은 산산조각났다. 남자는 자신이 하늘에 의뢰한 바람이 깨진 것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 날 이후 여자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남자를 만날 적에 여자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여자의 몸에서도, 차 안에서도, 가끔 여자의 집에 찾아갈 적에도 담배냄새를 느낄 수 없었다. 여자의 집 창문에 붙어있던 시트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하늘하늘한 커텐이 자리잡았다. 제대로 된 침대를 놓고 각종 가구와 집기들을 사들여 방을 꾸몄다.
여자는 더 이상 믹스커피를 즐기지 않았다. 커피가 싫어졌다며 꽃잎이 들어간 티를 사서 마시기 시작했다. 여자의 옷차림이 바뀌기 시작했다. 허름한 옷을 아무렇게나 입던 모습은 사라지고 상큼하게 꾸민 옷을 입었다. 그동안 한 번도 볼 수 없던 악세사리라는 것을 했다. 향수를 쓰기 시작했다. 화장이 조금씩 진해졌다. 힐을 신었다. 펌과 염색을 했다. 목소리가 밝아졌다. 걸려오는 전화와 메신저의 울리는 빈도가 늘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여자의 변화를 아쉬워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여자는 누가 봐도 전보다 아름다워졌고 밝아졌으며 상큼함도 느껴졌다. 하지만 남자는 믹스커피를 마시는 여자의 모습을 더 좋아했고 담배 냄새가 짙게 풍기던 여자의 내음을 좋아했다. 짜장면집에서 나와 커피에 담배로 입가심을 하고선 나눴던 첫키스를 그리워했다. 남자의 달라진 애인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남자가 예전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을 두고서 남자가 미쳤다고 했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남자가 이별 얘길 꺼내들었을 적에, 그 이유를 들은 여자는 진심으로 기가 차 했다. 내가 무엇때문에 누구때문에 이렇게 바뀌려 노력했는지는 아느냐라는 질문에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다시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냐, 그것때문에 헤어지자고 하는 것이냐는 질문엔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남자의 뺨을 올려붙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남자도 몸을 돌려 걸어갔다. 남자는 되돌아보지 않았다.
남자는 길을 걷다 본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았다. 자판기 옆엔 누군가가 피우다 버린 담배 꽁초들이 빈 종이컵 위에 산처럼 쌓여있었다. 남자는 커피가 나오길 기다리며 여자가 올려붙인 왼뺨을 어루만졌다. 입안이 터졌는지 입에서 짙은 쇠맛이 풍겼다. 남자는 침을 뱉었다. 끈적한 핏덩이가 하나 얽혀나왔다. 남자는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