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01607 / 성의] 남들처럼. by 란테곰

란테곰 2016. 7. 31. 10:22

우리나라 남자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때도 그랬지만 요즘은 정말 당연스레 대학교도 가고, 그 사이에 군대도 다녀오면 학생이라는 명함을 뗄 때엔 대략 이십 대 후반이 된다. 그렇게 쓰는 시간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뻔하디 뻔한 말도 좋고 남들처럼 살기 위한 발버둥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내 또래 친구들이 앞으로의 삶을 향해 투자를 하는 사이 난 내가 하고 싶은 것들만 하면서 지냈다. 놀고, 놀고, 또 놀았다. 혼자 타지에 넘어가 살며 하루에 한 끼 먹으며 버티고, 돈이 필요하면 근근이 알바를 하며 버티면서도 오로지 내가 하고 싶은 일에만 매진했다. 그게 바로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의 전부였기에 그 당시엔 그게 무엇보다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남들이 빨리 가려고 애쓰던 군 입대마저도 한없이 미룰 정도로 그 세상에 미쳐있었다. 친척이나 지인들이 하는 옳은 말들은 모두 잔소리로만 들렸고, 내가 짊어진 것들은 오로지 나만 알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고등학교 시절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유일한 혈육인 동생과의 연락도 끊었다. 그저 꿈과 이상만 컸지 현실을 바로 잡으려는 의지를 놓은 채 버러지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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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이틀 쉬고 하루에 열 두 시간을 주유소에서 일하며 동네 허름한 여관 셋방에 거주하던 무렵 연락이 왔다. 동생이 많이 아프다, 수술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장 짐을 싸서 다시 내가 살던 동네로 올라왔다.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느라 7년 만에 동생을 만났지만, 동생은 이미 수술 전 마취로 인해 날 알아보질 못했다. ‘이렇게 저렇게 진행할 거니 세 시간이면 마무리가 된다는 의사의 말을 남기고 수술실 입구는 문이 닫혔고 곧 문 위엔 수술중이라는 불이 들어왔다. 하지만 약속한 세 시간이 지나고 네 시간이 지나고 다섯 시간이 지나도 수술실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무나 초조한 마음에 줄담배를 피우며 동생이 믿는 신에게 마음속으로 협박을 했었다. 니가 만약 오늘 내 동생을 데려가면 넌 정말 미친 쓰레기 새끼라고, 열심히 살 테니까 제발 내가 남들처럼오빠 구실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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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협박(?)이 먹혔을까. 동생은 이후 재수술 한 번, 한 달간의 중환자실, 그리고 두 달 입원이라는 긴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지만 결국 퇴원을 할 수 있었다. 동생이 병원에 있는 사이 내가 노느라 놓아버렸던 친척들과의 교류도 어느 정도는 회복이 되었다. 1년에 두 번 만나더라도 끈끈한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는 사이가 주는 위안감은 우리 남매에겐 너무나 큰 힘이 되었더랬다. 술만 마시면 싸우는 친척이더라도 평소(?)엔 그만큼 친한 사이가 없어서. 부모님 제사를 내 손으로 처음 차리던 그 날 일가 어르신들이 모두 우리 집에 오셔서 제사상을 준비하는 요령이나 상 차리는 법을 알려주셨던 것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네가 남들처럼오빠 구실 잊지 말고 살아가라는 말씀 역시 가슴 깊이 아로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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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들 표현을 빌자면 뒤늦게나마 정신 차린 난 어떻게든 두 식구 건사를 위해 노력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미뤘던 군 입대를 공익으로 버텨내며 겪었던 생활고 문제나 소집 해제 이후 겪었던 몇몇 문제들은 그야말로 투쟁에 가까울 정도로 큰 시련이었다. 일이 생길 때마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게끔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지, 일이 터진 당시엔 정말 너무나 크나큰 압박감을 이겨내기 힘들 정도였다. 거기에 하고 싶은 것들만 골라서 하느라 흘려보낸 시간들에 대한 후회에다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까지 더해지니 멘탈은 가루가 되고 정신은 피폐해졌다. 담배도 술도 뱃살도 늘어만 갔다. 우연히 좋은 사람을 만나도 도움만 받았지 남들처럼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채 떠나보냈고 일 역시 오래 하질 못한 채 나이만 잔뜩 먹은 우리 남매에겐 여전히 삶은 빡빡하기만 하다. 지금도 후유증으로 응급실을 오가는 동생을 챙기다보면 낮밤이 바뀌는 것 정도는 문제도 아닐 지경이다. 그저 병원에서 돌아올 적에 서로가 서로를 위해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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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렇게 사는 우리도 웃을 일이 있다는 것, 그것 하나는 우리도 남들처럼산다 말할 수 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들고서 함께 마트에 가 장을 보고, 크게 공들이지도 않은 반찬에 맛있게 밥을 먹고, 빨래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씻고 누워 자는- 그렇게 뻔한 하루를 보내며 함께 웃는 일이 몇 번이나 되겠냐만. 그래도 우리 동네 핫 플레이스인 편의점과 마트에서 인정받은 사이좋은 남매다. 딱 한 가지, 나중에 몰아 쓰려고 쟁여둔 포인트를 야금야금 군것질로 해치우지만 않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