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아닌 어떤 세상

[에일레스] 바다

에일레스. 2015. 9. 27. 02:29

그 바닷가 마을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조용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마을을 둘러보면서, 현우는 왠지 기분이 좋아져 활짝 웃으며 진우를 바라보았다.

"여기 괜찮은데?"

진우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이 형님만 믿으라고 했잖냐."

 

여름 방학을 맞아, 진우가 현우에게 제안한 여행이었다. 언젠가 가족끼리 가본 적 있는 작은 어촌이라고 했다. 아주 조용하고, 낚시 하기 딱 좋은 곳이라고 진우가 강력하게 추천을 했다. 낚시를 해본 적이 없어서 현우는 조금 망설였지만 진우가 하도 좋다고 하니 결국엔 같이 가기로 결정했다.

둘은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란 동갑 친구 사이였다. 이름이 비슷해서 형제같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같은 학교를 다녔고, 대학도 전공은 달랐지만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진우가 현우를 따라 지원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현우는 진우가 자신을 소중한 친구로 생각해주는 마음이라 여겼고, 그것이 더욱 우정이 돈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정류장 앞에 서서 진우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예약해 둔 민박집인 것 같았다.

"네, 저희 도착했는데요. 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진우는 현우를 보며 다시 싱긋 웃었다.

"여기서 기다리래. 데리러 온대."

잠시 후, 낡은 봉고차 하나가 털털거리며 먼지를 이끌고 정류장에 도착했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새카만 얼굴의 중년 남자가 창문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조금 무섭게 생겼다-고 현우가 생각하는 순간, 남자는 사람좋은 미소를 가득 띠며 말했다.

"서울에서 오셨지요? 타세요!"

둘이 차에 올라타자, 남자는 자기 소개와 마을 소개를 혼자 떠들기 시작했다. 이 마을은 작지만 어획량이 높기로 소문난 곳이고,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는 마을 주민들은 덕분에 충분히 풍족하게 살고 있다고 자랑을 했다. 자신은 이 마을의 이장이며, 대대로 이장을 하고 있는 집안이라는 것도 자랑스럽게 말했다. 현우는 예의상 이장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고, 진우는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시골이라 해가 빨리 진다고 하긴 했지만, 정말로 금세 어두워지더니 밤이 찾아왔다.

이장의 집은 이장 부부가 거주하는 본채와 민박으로 내주는 별채가 약간 떨어져 있는 구조였다. 이장은 소리지르고 놀아도 된다면서 둘이 편하게 놀라고 말해주고는 가버렸다. 진우와 현우는 배낭 안에 잔뜩 챙겨온 고기와 술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바다 낚시를 가기로 한 참이라 술은 각 1병씩만 하기로 했다.

진우가 뭔가 이상해보인다, 고 생각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진우는 이 마을에 도착한 직후부터 유난히 말이 없었다. 술을 마시는 동안에도 왠지 모르겠지만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원래 이러는 친구는 아니었기 때문에, 현우는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너 무슨 일 있어?"

"아니. 왜?"

"계속 얼굴도 안 좋고.. 말도 안하는 것 같고. 왜 그래?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은.. 아니야."

"말해봐. 뭔데 그래."

"그냥.. 집에 일이 좀 있어. 지금 말고.. 나중에 말해줄게."

"나중에 언제?"

"음.. 내일 낚시갈 때?"

진우는 앞에 놓인 잔을 후루룩 비우고는 벌떡 일어났다.

"야, 자자. 내일 새벽에 일어나야 돼."

현우는 왠지 더 묻지 못하고 진우를 따라 일어섰다. 어려서부터 드나들면서 늘 친숙했던 진우의 부모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 분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내일이면 알게 되겠지.

 

"현우야, 일어나."

살짝 몸을 흔들며 나지막하게 자신을 깨우는 진우의 목소리에 현우는 눈을 떴다. 아직 눈 앞이 캄캄했다.

맞다, 여기는 시골이지. 불빛이 거의 없었다.

진우를 따라 나온 비틀거리며 나온 바깥은 여름이지만 공기가 싸늘했다. 찬 숨을 들이키다 보니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진우가 씨익 웃었다.

"조금 쌀쌀하지?"

"그러네. 여름 안 같다."

진우는 기운내라는 듯 현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어느새 이장이 그들 앞에 와서 조금 늦었다며 어서 가자고 서둘렀다. 둘은 이장을 따라 어두운 길 위를 걸었다. 캄캄한 바다 위에 밝은 전등을 매달은 배 한척이 보였다. 생각한 것보다 배가 컸다. 이장 말고도 마을 사람들로 추정되는 몇몇이 배에 올라 장비를 점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배에 오르자 현우는 조금씩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묘한 흥분이 핏속에 흐르는 것 같았다.

"우와. 나 떨리는 것 같아. 네 덕분에 바다 낚시 처음 해보네!"

현우가 낮게 탄성을 지르자 진우가 킥킥 웃었다.

"긴장되냐?"

"어, 조금. 웃긴다, 야. 이게 뭐라고.."

현우는 어깨를 으쓱 하고는 근육을 풀듯 양 팔을 살짝 들어 어깨를 돌렸다. 정말 긴장이 되었다. 컴컴한 바다는 어떤 것을 숨기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을만큼 아득하고 신비로워 보였다.

 

배는 그 어두운 바다로 나아갔다. 일단 한참 나아간 다음에 낚싯대를 드리워야 한다고, 곁에 온 이장이 설명해주었다. 계속 긴장하고 있는 현우에 비해 진우는 하나도 긴장한 것 같지 않았다.

"진우 넌 바다 낚시 많이 해본거야?"

"어렸을 때 아버지랑 가족들 여기 왔을 때 해봤던 것 같아."

"그떄 이후로 그럼 한번도 안한거야? 근데 넌 뭐 이렇게 프로 낚시꾼 느낌이냐?"

"뭐.. 낚시쯤이야."

진우는 어쩐지 다시 말수가 줄어들어 있었다. 현우는 어젯밤에 진우가 오늘로 미룬 이야기를 해달라고 할까 생각했지만, 낚시를 하면서 좀 더 분위기가 편안해지면 말을 꺼내기로 마음 먹었다.

 

드디어 배가 멈춰섰다. 뱃머리에 서서 바다 구경을 하고 있던 진우와 현우 뒤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사람들이 상을 펼쳐놓고 뭔가 제사음식 같은 것들을 올려놓고 있었다. 현우는 흥미롭게 그 광경을 바라보며 진우를 따라 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다 나가기 전에 뱃사람들이 바다에 제사를 지내고 뭐 그런다는 얘기는 얼핏 들었던 것도 같았다.

빠르게 상이 차려지고, 이장이 제일 먼저 상 앞에 나서서 절을 했다. 뒤이어 사람들이 줄줄이 나와 절을 했다. 이상한 것은, 가장 마지막에 진우가 나온 것이었다. 진우는 현우가 눈치재지 못하는 틈에 어느새 상 앞에 서 있었다. 진우가 절하는 모습을 보며 현우는 자신도 같이 해야 하나 싶어 한발짝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뭔가가 현우의 머리를 강타했다.

충격을 받고 다리가 휘청 꺾인 현우에게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팔다리가 꽁꽁 묶이고, 현우는 흐릿해지는 시야로 계속 진우를 찾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절을 마친 진우가 현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었다.

 

풍덩..

현우가 바다 깊숙이 가라앉았다.

진우는 사람들이 현우를 바다로 던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런 일이었구나..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것에 진우는 더욱 놀라고 있었다.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인데.. 언젠가는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진우 옆에 이장이 와서 섰다.

"수고했다."

"네.."

"아버지는 잘 계시냐?"

"네.. 지금쯤 이사하고 계시겠네요.."

"다음엔 너무 잘 아는 사람은 데리고 오지 마라.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냐."

"어쩔 수 없었어요.. 다음에는 주의할게요."

이장은 진우의 어깨를 툭툭 친 후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진우는 자신의 운명을 알았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이 마을에 '종속'되어 있는 운명이라고, 아버지는 설명했다.

일평생을 이 마을과는 상관없는 곳에 살았지만, 그의 집안 남자들은 10년마다 이 마을로 돌아왔다. 곁에 사람을 한명씩 데리고서였다. 데리고 온 그 한명의 역할은 분명했다. 이 바다에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10년간 이 마을 사람들은 풍족하게 보낼 수 있었다. 진우의 집안도 그 복을 같이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을 의심했던 사람이 없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진우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10년의 기간에서 1년을 넘겨버렸던 그 때, 멀쩡하게 잘 되던 아버지의 공장에서 갑자기 큰 화재가 발생해 사업이 망할 지경에 이르르자 아버지는 진우를 데리고 이 마을에 왔었다. 오는 길에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나 같이 오게 된 것은,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정말 행운이라고 했다. 아니었다면 그때 바다 속에 잠겼을 사람은 어린 진우였을 것이었다.

초등학생이던 진우는 확실히 보았다. 그 때의 마을 사람들의 굶주리고 원망 가득한 눈빛을. 그 1년 동안은 정말 이 마을도 힘들었던 것이었다. 아버지의 옛 친구가 바다에 던져진 이후에, 진우에게 했던 것처럼, 이장은 아버지의 어깨를 툭툭 치고 갔다. 아버지는 배에서 내린 이후에야 진우를 꽉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고 난 후 10년, 진우는 그 날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이 올 것을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진우는 밝아진 바다를 둘러보았다.

이제 다시, 다음 10년 후를 준비하기 시작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