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 / 일기] 일기 by 에일레스
요즘 애들도 숙제로 일기를 쓸까? 잘 모르겠다.
나 어렸을 때는, 매일 일기를 써서 검사를 맡았다. 유치원 다닐 때도 그림일기 같은 거를 썼던 것 같지만 그건 잘 기억이 안 나고,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에 꼬박꼬박 일기를 썼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일기를 잘 쓰는 어린이였다. 뭔가 끼적이기 좋아하는 나의 습성은 그때부터 발현되었는지도 모른다. 두살 아래 내 동생이 상대적으로 일기 쓰는 걸 싫어했고 주변 친구들도 그닥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 것 보면 내가 좀 특이한 케이스였는지도 모른다.
사실 국민학생의 하루가 뭐 그리 달랐으랴. 매일 일기 쓸 만한 내용이 뭐가 있었겠는가. 어쩌면 교사라는 직업상 그런 재미없고 말도 안되는 꼬맹이들의 일기를 읽어야 했던 선생님의 고역은 보통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금은 한다. 그때는 당연히 못했다. 나는 매일 일기를 제출했고 거기에 선생님이 찍어주는 짧은 멘트와 참 잘했어요 도장이 좋았던 어린이였을 뿐이었다.
그때의 내 일기는 당연히 선생님이 보는 것이었다. 아마 엄마도 봤던 것 같다. 그땐 그게 당연했다. 일기 쓰고 검사받는 것이. 국민학생에게 사생활이나 비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그때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국민학교 4학년 때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매년 하는 운동회가 있었다. 학년별로 뭔가 크게 준비를 했었는데, 그때 했던 것은 아마 남녀학생이 짝을 지어 춤추는 그런 종류였을 것이다. 3학년 때에도 그 비슷한 것을 했었다. 그때는 담임선생님이 나와서 시범을 보여줬었다. 나는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담임선생님과 체육선생님이 동작을 가르쳐주고 있었는데, 앞줄 쪽에 있었던 내가 불쑥 소리를 쳤다. 선생님이 시범보여주세요! 두분이 해보세요! 뭐 그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담임선생님은 20대 중반 쯤의 젊은 여선생님이었는데, 또렷한 인상의 미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이 화를 내는 것을 그때 나는 처음 보았다. 너는 선생님이 네 친구인 줄 아니? 이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하도 오래 된 일이라, 사실 자세히는 기억이 안 난다. 선생님은 화를 냈고, 나는 좀 놀랐으며, 선생님한테 밉보였을까봐 걱정을 했다. 그날 집에 와서 나는 일기를 썼다. 그 일기를 선생님이 볼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일에 대해서 썼다. 내가 썼던 마지막 문장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나를 좋게 봐주시는 편이었던 선생님이 나를 미워할까봐 걱정이 된다.' 이 비슷한 문장이었다.
엄청 고민하고 쓴 문장이었다. 차마 선생님이 나를 '예뻐하던' 이라고는 못 쓰겠고, '좋게 봐주시는' 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잘 안 섰던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웃프구나..
저렇게 쓰면 선생님이 보고 코멘트를 달아주실 거였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일기를 생각하다가 떠오른 영화가 이 작품이었다. 데이빗 핀처 감독의 작품으로, 소설 [곤 걸]을 영화화한, 동명의 작품이다.
국내 개봉명은 <나를 찾아줘>.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해보이는 닉과 에이미 부부.
결혼 5주년 아침, 에이미가 실종된다.
유명한 어린이 소설 '어메이징 에이미'의 실제 모델이었던 에이미의 실종으로 떠들썩해진 가운데 경찰은 에이미가 남긴 단서를 추적하다가 남편 닉이 에이미를 살해했다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닉은 완강히 그 사실을 부인한다.
영화의 전반은 에이미가 쓴 일기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된다.
에이미는 닉을 만난 순간부터 일기를 썼고, 에이미의 실종 이후 추적하던 경찰에 의해 발견된다.
에이미의 일기 속에서 닉은 게으르고, 방탕하고, 도박하고, 폭력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에이미는 거기에 고통받고 충격받으며 두려워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에이미가 쓴 일기의 마지막은 닉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내용으로 끝난다.
그 밖에 이런저런 단서들로 인해 닉은 에이미의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다.
이 영화의 반전은 후반부에서 시작된다.
에이미가 실종되던 날로 영화는 다시 되돌아가고, 그날 에이미의 행적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리고 일기장 속이 아닌 진짜 에이미의 나레이션이 시작된다.
그러니까, 에이미의 일기장은 가짜였던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서, 그녀가 허구로 지어낸 일상을 적어낸.
다시 내 얘기로 돌아가서.
일기장을 돌려받았을 때, 예상대로 선생님의 코멘트가 달려 있었다.
은미가 그런 말을 해서 선생님이 많이 속상했으며, 앞으로는 그러지 말도록 하자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기억한다.
그 코멘트를 읽고 조금 마음이 놓이면서도 뭔가 서운한.. 그런 기분이 들었었다.
솔직히 그때에도, 그리고 지금도, 나는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ㅋㅋㅋㅋ
아무튼 그 일은 그렇게 지나갔지만, 내 기억엔 이렇게 오랫동안 남아있다.. 20년이 넘도록.
그리고 그때 알았다. 일기는 그렇게 선생님이나 엄마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할 수 있는 도구라는 것을. 그때부터 나는 누군가가 내 일기를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썼던 것 같다.
그게 내 일기를 망쳤다.. 그렇게 생각한다.
내 글쓰기 자체를 망쳤는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뭔가 그냥 솔직하게 글을 쓰지 못하게 된 것 같다. 국민학생 때는 글짓기 대회 같은거에 곧잘 나가곤 했었는데,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상 받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러더니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내가 언제부터 글짓기를 잘했었나- 싶은 아이가 되었다.
당연했다. 나는 이렇게 쓰면 읽는 사람이 잘썼다고 생각할까? 를 중점적으로 생각하고 글을 썼었으니까. 그리고 읽는 사람의 의중까지 파악하기에 내가 그렇게 수준 높은 애는 아니었으니까.
중학생 때인가- 언젠가 이사가던 때에, 나는 몇년간 모아놨던 일기장들을 모두 내다 버렸다. 나중에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 중에서 자기는 어렸을 때 일기들을 모두 모아두고 있다는 애를 보았을 땐 나도 예전엔 다 모아놨었는데- 라고 조금 아쉬워하긴 했지만, 곧 별 생각이 없어졌다.
다시 봐도, 별 재미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블로그에 가끔 일기랍시고 그때 그때의 기분 같은 것을 끼적인다. 블로그에도 못 쓸 글들을 쓰기 위해 개인 비밀 카페도 만들었었는데, 거긴 진짜 임금님귀는 당나귀귀!! 하러 갔었다. 지금은 거의 버려졌다.. 블로그를 하기 전엔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고 무료 게시판을 붙여서 거기에 글을 썼었다. 사실 꽤 많이 썼는데, 지금은 서비스를 안해서 그 글들이 다 날아갔다. 그거야말로 조금 아깝다..
인터넷에 쓰는 글이란, 이렇게 서비스가 종료되면 그렇게 날아갈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것이다..
그럼에도 편의성에 길들여져서- 펜보다는 키보드를 두드리는게 훨씬 편하게 되어버렸다.
사실 온라인에다 글을 쓴다는 것 역시,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행동이다.
내가 아무리 내 마음대로 나 쓰고 싶은거 쓰는 곳이라고 해도, 결국 누군가는 본다.
아주 폐쇄적으로 비공개로 해놓고 쓰지 않는 이상.
결국은 솔직한 것이 중요할 것이다..
내가 나를 속이지 않는, 솔직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