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일레스] 초능력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L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는 지금 오래 전에 문을 닫은 실내 낚시터 앞에 와 있었다. 낚시터 문은 폐쇄되었다는 뜻으로 테이프가 여러 겹 가로질러 쳐져 있었다. 이곳은 경찰청 수사기획과 K 과장의 은신처였다. K 과장은 아무도 없는 이 낚시터에서 물고기도 살지 않는 더러운 물 안에 아무 것도 잡히지 않을 것을 알면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겨 있을 것이었다. L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그냥 알았다.
그가 형님으로 모시는 C는 그것을 '초능력'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L이 교통사고를 당한, 두달 전부터 시작되었다.
L은 혼자 차를 몰고 어디론가 가다가, 트럭에게 받히는 사고를 당했다. 늘 C와 붙어다니던 L이 어딜 가는 중이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L 스스로도 몰랐다. 그는 자신의 이름조차도 잊어버린 상황이었다.
일시적 기억상실, 이라고 의사가 말했다. 사고를 당하면서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아 일시적으로 기억에 혼란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주변 사람들이 자성의 기억을 계속 일깨워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의사의 소견이었다.
C는 L의 사고가 모두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C는 일단 L이 그렇게 큰 사고를 당했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는 것에 매우 감사했다. C는 L의 곁을 잠시를 떠나지 않고 지극 정성으로 간호했다. L은 아득한 기억 속에서도 C와 함께 여수 바닥을 돌아다니던 시절을 떠올려냈다. L이 그것을 이야기했을 때 C가 얼마나 기뻐하던지- L은 그때의 C의 얼굴에서 감동을 느꼈다.
이제 그가 알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C 뿐이었다.
뭔가 이상한 능력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L이 3주간의 입원생활을 끝내고 퇴원하던 날부터였다.
C의 부축을 받으며 L이 병원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계단 아래에서 C와 L을 모시는 동생들이 줄지어 서 있다가 둘을 향해 허리굽혀 인사를 했다. L은 C에게 의지한 채 동생들 사이를 지나 기다리고 있던 차를 향해 걷다가- 문득 한 남자에게 눈길이 쏠렸다. 아는 얼굴이었다. 오랫동안 L 밑에서 일했던 동생이기도 했다.
그리고 L은 고개를 돌려 C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형님, 저 놈.. 짜바리예요."
C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잠시 일그러졌다가, 곧 아무렇지 않다는 듯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C는 L을 데리고 가던 방향 그대로 걸어가 차에 태웠고, 말없이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너.. 그거 확실하냐?"
"네."
"어떻게 아냐 그걸?"
"... 모르겠어요. 그냥 알아요."
"후.."
C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몸을 앞으로 굽혀 조수석에 앉은 동생에게 낮게 뭔가를 속삭였다.
그것이 첫번째였다.
C의 명령을 받은 동생들은 L이 지목한 놈을 끌고 갔고, 그놈의 집에서 경찰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놈은 시멘트 통에 담겨 인천 먼 앞바다 물 속에 잠겼다. C는 L이 그것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해했지만, L은 스스로도 그것을 설명할 수 없음에 답답했다. 그냥.. 알 수 있었다.
그렇게 L이 조직 내의 짜바리를 세번째 잡아냈던 날, C는 L에게 말했다.
"초능력이구만- 초능력이여. 기억을 잃고 초능력을 얻었구만!"
C는 L에게 다른 제안을 해 왔다. 기왕지사 경찰도 몇 잡았겠다, 녀석들은 계속 우리를 감시할 것인데, 차라리 우리가 먼저 치는 것은 어떠냐-는 것이었다.
"조무래기들 말고, 대가리 쪽에 대한 정보는 안 나오냐?"
C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와 동시에 L의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이, 바로 K 과장이었다.
이 모든 짜바리들을 보내는 인물.
이 모든 계획들의 기획자.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쉬웠다. L은 신기하리만치 또렷하게 K 과장이 잘 가는 곳들을 떠올려내기 시작했다. C는 그냥 L이 말하는 대로 사람을 보내 확인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K 과장은 대부분의 장소에 부하 경찰들을 이끌고 다녔고, 좀처럼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L은 그가 혼자 은신해내는 장소를 떠올려냈다.
그곳이 바로 이, 폐쇄된 낚시터였다.
C는 만일을 대비해 외부에서 사람을 불러 그 곳으로 보내기를 권했다. 하지만 L은 왠지 이번만큼은 자신이 찾아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C는 어쩔 수 없이 허락하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사람 하나를 더 붙여주기로 했다. C가 불러온 사람은 연변에서 온 남자로, 더러운 행색에 오랫동안 씻지 않은 냄새가 났다. 그는 지금 L과 함께 낚시터 앞에서 대기중이었다.
L이 먼저 낚시터에 들어갔다. L이 K 과장을 확인하면, 연변 남자가 작업을 하기로 했다.
L이 생각했던 대로, K 과장은 어둑한 실내에서 낚싯줄을 드리우고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었다. L과 연변 남자는 태연하게 K 과장의 옆자리로 가 의자를 펴고 앉았다. K 과장이 홀끗 옆을 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는 L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너..! 뭐야!"
L도 당황해서 벌떡 일어났다. K 과장은 분명히 L에게 말하고 있었다. 연변 남자가 L과 K 과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동안 어떻게 된 거야! 여긴 왜 왔어?"
K 과장이 L에게 소리쳤다. L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연변 남자는 여전히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뭔가 결심한 듯, 빠른 걸음걸이로 L 앞으로 와서 K 과장을 마주보고 섰다.
탕!
연변 남자의 품에서 나온 사제 총이 벼락같은 소리를 냈다. 총구는 K 과장을 향해 있었다. K 과장은 가슴팍을 쥐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K 과장의 손가락 사이에서 피가 넘쳐 흘러내렸다. 연변 남자는 K 과장에게 다가가더니 이번엔 거침없이 기다란 칼을 꺼내어 배를 찔렀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K 과장의 입에서 신음소리도 터져나왔다. 연변 남자는 거센 몸짓으로 칼을 뽑고, K 과장을 발로 차서 더러운 물에 쳐 넣었다. L이 멍하니 서있는 아주 잠깐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빨리 나오시라요. 갑시다 이제."
연변 남자가 가지고 온 것들을 빠르게 챙기고 나가며 L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연변 남자가 낚시터를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L은 그 자리에 서서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총소리와 함께 L의 기억이 돌아왔다.
그의 신분은, 조직에 잠입수사 중인 경찰.
신입 경찰 시절 K 과장에게 제안을 받아 잠입 수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여수 지역 건달이던 C에게 접근하여 정보를 얻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생각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