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 / 기억상실] 당신은 마흔 일곱 살이야. by 김교주
새벽 3시에 잠들어서 5시에 눈이 떠졌다. 글을 써야 하는데,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출근해서의 두 시간을 보냈다. 지금 내 상태는 수면부족과 더불어 회사의 경영난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엉망이다. 아마 지금부터 써내려갈 이 글도 비슷해지겠지. 미리 용서를 구하며 말문을 연다.
영화 <킹스맨>의 주인공은 에거시가 아니라 갤러해드, 콜린 퍼스.
이렇게 섹시하고 중후한 남자를 왜 지금까지 눈여겨 보지 않았을까 자책하며 그의 필모그래피를 뒤져보다가 초미녀 배우 니콜 키드먼과 함께 한 <내가 잠들기 전에>라는 영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토렌트 같은 어둠의 경로를 이용하지 않은지 오래였기 때문에 조금 망설이던 찰나 이 영화의 원작은 책이라는 걸 깨닫고 올레! 를 외치며 구입.
하루짜리 기억력, 자고 일어나면 20대의 자신만을 기억하는 여자. 마치 영화 메멘토 의 그것처럼 주인공 크리스틴의 하루 하루는 숨가쁘고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자기 옆에서 밤을 함께 보낸 스스로를 내 남편이라고 말하는 남자에 대한 불신, 자신이 찍혀 있기는 하지만 정말 자신인지 아닌지 모를 사진들, 출산했다고는 하지만 기억에 없는 아들, 희미하다 못해 모래먼지 만큼의 실마리도 없는 과거.
크리스틴은 남편이 차분하게 일러주는 대로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 내려 애쓴다. 내쉬 박사의 도움을 받아 퍼즐을 맞추듯 잃어버린 삶을 조각조각 이어 나가는 그녀의 분투는 눈물겨우면서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짜릿한 스릴감을 선사한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나라면. 나는?
가끔, 손목에 끼워둔 머리끈을 열심히 찾기도 하고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면서 전화기를 찾기도 한다. 이런 단순하면서도 어이없는 기억력 감퇴는 나의 나이 들었음을 자각하게 만들고 심하게는 우울감에 사로잡히게도 한다. 이럴진대 작품 속의 크리스틴은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면 10년 동안의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더 이상 젊거나 아름답지 않은 자신을 마주하고 경악하는 내게 누군가 다가와 "당신은 마흔 일곱 살이야.."라고 이야기한다면 나는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크리스틴처럼 격렬히 저항하고 끊임 없이 진짜 자기 찾기의 여정을 반복하면서 결국에는 스스로를 알아낼 수 있을까?
고백하건대, 자신이 없다.
2011년 여름 한국에 출간된 이 작품은 놀랍게도 S.J. 왓슨의 데뷔작이다. 이렇게 강렬한 데뷔작은 본 적 없다는 평단의 격찬과 함께 왓슨은 내게도 잊지 못할 독서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후 이 작가의 행보가 기대되는 것은 물론이다. 마거릿 미첼이나 김승옥 처럼 원 히트 원더로 남지 않기를. 부디.
사족.
영화와 책의 내러티브가 여러 모로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상상력을 극대화하고 싶다면 영화보다는 책을 권한다. 콜린 퍼스와 니콜 키드먼이 만나 멋진 스릴러를 만들어 냈다고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