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 / 이별] 기억. by 란테곰
심장이 강하게 고동치고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날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상대의 고개를 돌려 내 눈과 맞추어 상대의 심정을 읽고 싶었다. 내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는 표정을 숨기려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아 결국 손을 놓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표정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야 말았었다. 내 손이 아닌 것 같은 손으로 주머니를 더듬어 담배를 꺼냈는데, 몇 번이나 시도해도 도통 불이 붙어주질 않아 결국 라이터를 집어던져버리고 다시 한 번 물었었다.
“그 말, 무슨 말이야?”
생각지도 못하게 잔뜩 떨고 있는 내 목소리를 듣고선 쯧, 속으로 혀를 찼었다. 목소리가 떨리는 이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꺼낸 상대에게 드는 당혹감이었고, 나머지 부분은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통보로 인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떻게든 진정을 하고 얘기를 나누기 위해 딴생각이라도 잠시 해볼까 싶었는데, 오늘이 4월 1일이라서 무서운 장난을 쳤나보다라는 심하게 낙천적인 동시에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른 것에 기가 차서 한숨을 푹 쉬고, 다시 물었었다.
“갑자기 왜, 왜 헤어지자고 그러는거야? 이유를 말해줘. 납득할만한 이유를.”
눈을 맞추는 것을 피하고 있던 상대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젠장. 상대의 눈 안에, 얼굴에, 온 몸에서 풀풀 풍겨 내게 전해지는 가장 큰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차라리 내게 전해지는 감정이 내 잘못이나 실수로 인한 분노였다면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줄 생각을 먼저 했을텐데, 당장의 분노였다면 다시 받아들여줄 일말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을텐데, 미안함이라는 감정으로 무장한 상대에게 무기를 들고 어딘가에 나있을 작을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에 상대의 무장은 너무나 단단하고 빈틈없어 보였다.
“오빠가, 오빠로밖에 안 보여. 가슴이 떨리질 않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상대의 대답 안에, 상대의 결정 안에 ‘나’는 포함되어 있질 않았었고, 난 그제서야 왜 상대에게서 전해진 감정이 순수할 정도의 미안함이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었다.
“약속을 잡아 만나고, 함께 밥을 먹고, 손을 잡고 길을 걷고, 포옹하고, 키스하고, 함께 잠들어 다음 날 아침 오빠 품에서 잠이 깨도 내 가슴이 떨리질 않는다구. 내 손을 잡고 있는 오빠 손이, 날 안고 있는 오빠 몸이 내게 익숙하고 따뜻하게 느껴지지가 않아. 그게 이유야. 이해해 줘.”
네 마음이 어떻든 내 마음은 이미 단단히 굳어졌고, 네가 아무리 두들겨봤자 내 마음에겐 계란에 불과하다는 확고한 결의를 이런 식으로 내게 통보하진 말라는 말이 목소리가 되어서 나올 뻔 했었다. 싫어진 건 아닌데 좋아지지도 않는다는 말에 어떻게 대꾸를 해야 할지를 몰라, 굳어버린 머리를 억지로 돌려보려 애썼지만 아무 말도 떠오르질 않았다. 오분 전 까지만 해도 혹시 마음을 읽어낼 수 있을까 싶어 날 봐주었으면 했던 눈이 계속 날 바라보고 있었지만, 상대의 마음을 읽은 후의 난 그 눈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삼십분 후. 혼란에 혼란이 쌓여 맴돌다가 어디에선가 잘못 되어 뫼비우스의 끈이 되어버린 머릿속에서 난, 이 끈의 앞면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걸어가는 기분으로 집을 향해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집에서 십분 거리였던 상대를 집에 바래다주며 산 담배는 그새 바닥을 드러냈었고, 난 집 앞 가게에서 담배를 하나 더 사 집으로 올라갔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책상 위에 놓여져 있던, 파란 포장에 금색 리본이 달린 상자를 챙겨들고 옥상으로 올라가 하늘을 보며 다시 담배 하나를 더 물었었다. 어제까진 이 상자를 언제 어떻게 전해줄지를 고민했는데 이젠 이 상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를 고민해야 되는구나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었다. 그 헛웃음은 곧 눈물로 바뀌어 상자를 적셨었고, 군데군데 물이 묻어 오그라진 파란 포장에 금색 리본이 달려있는 상자는 집 앞 쓰레기봉투에서 아침 햇살을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