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01402 / 스토킹] 깨어날 수 없는 꿈 by 에일레스

에일레스. 2014. 3. 1. 00:00

 

그래, 이 주제를 내고 뭘 쓸까 생각하면서 각오를 조금 하긴 했다.

이 글을 통해서 나의 흑역사-_- 중 하나를 말하게 되겠구나- 하는 것을.

 

그렇다. 솔직히 고백하겠다.

나는 '쪼금' 스토킹을 하던 사람이었다.

 

조금 자세하게 말하자면.. 음..

뭐 그냥 이것저것 추적(?)해서 싸이같은거 찾아내서 구경하고 그런게 기본이었고.. 거기서 조금 더 발전(;;)해서 어떤 때는 폰번호를 알아내기도 했다. 그래, 그 '끊는 전화'도 걸어봤다. 순전히 목소리가 듣고 싶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로.

뭐.. 그러고보니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선생님은 집 주소도 알아내서 (근데 내 기억으론 이게 누구나 쉽게 알수 있는 정보였다.. 그때 당시엔 그랬어..) 방학 때는 선생님 사시는 아파트(당시 살던 우리 집 바로 근처였다)로 가서 우편함에 편지 넣어두고 그랬다..

그냥 그때는 그렇게라도 뭔가 가까움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가상의 친밀감이랄까. 지나치게 일방적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가깝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니까.

 

이런 스토킹-_-들을 내 입장에서는 귀여운 수준이었다! - 고 우기고 싶다.. 하지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썩 좋지 않았을 수는 있겠지..하는 생각을 이제는 한다.. 어쨌거나 짝사랑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스토킹(...)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참 흑역사다..

 

음음.. (마음을 가다듬고..)

 

아무튼.

그런 내가 진짜 부러워하는 영화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이 영화다.

 

 

 


중경삼림 (2013)

Chungking Express 
8.2
감독
왕가위
출연
양조위, 왕비, 임청하, 금성무, 주가령
정보
로맨스/멜로, 드라마 | 홍콩 | 101 분 | 2013-11-28

 

 

(얼마전에 왕가위 3부작으로 재개봉해서 개봉일이 2013년으로 나오는 모양인데, 원래는 1994년 작품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한참 비디오 대여점의 단골로 활동하던 중학생 시기였다. 그리고 당연히,이 영화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 다음에 본 <동사서독>은 나를 더욱 혼란에 빠뜨렸고, 그래서 나는 그 후 왕가위 감독과 친해지기를 포기했던 것 같다.

이 영화를 다시 본 것은 대학 다닐 때, 친구가 DVD를 내게 선물로 줬을 때였다. 그 DVD로 다시 본 이 영화는, 나의 첫인상보다 재미있었다. 그리고 부러웠다.. 바로 두번째 에피소드가 그랬다.

 

 

 

 

 

 

네명의 주인공이 둘씩 등장하는 두 개의 에피소드로 만들어진 옴니버스 영화인 <중경삼림>의 두번째 에피소드는 스튜어디스였던 애인과 헤어진 경찰 633번(양조위)과 그가 단골로 다니는 야식집 직원 아비(왕정문, 또는 왕비)의 이야기이다. 633이 매일 이 야식집에 들르는 것을 아는 스튜어디스 전여친은 이곳에 그에게 줄 편지와 그의 집 열쇠를 맡기고 가고, 633은 그 이야기를 전해 듣지만 왠지 열쇠를 받아가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아비는 그에 대한 마음을 무럭무럭 키워가고, 우연히 그의 집 주소를 알게 된다.

 

"그날 오후 꿈을 꾸었다. 그의 집을 방문하는...

 난 깨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어떤 꿈은 영원히 깨어날 수 없다."

 - 아비의 나레이션

 

아비는 매일 그의 집을 몰래 찾아가기 시작한다. 그가 없는 곳에서 아비는 그의 물건들이나 그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돌아보고, 마치 우렁각시처럼 그의 살림들을 돌보기 시작한다. 집을 청소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낡고 오래된 것들을 새 것으로 바꾸고, 그의 집에 있는 CD 플레이어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CD를 넣어두는 식이다.

 

여기서 재미있은 설정은, 633이 집의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는 점이다.

 

 

 

 

 

 

 

 

 

 

 

 

 

 

 

 

 

 

여자친구가 떠난 후 그는 집안의 물건들을 의인화하며 위로하는 대화를 나누곤 했다. 다 써가는 비누에게, 낡은 수건에게, 오래된 인형에게, 그리고 여자친구가 남겨두고 간 스튜어디스 유니폼에게.

 

 

 

 

 

 

 

 

 

 

 

 

 

 

 

 

 

 

 

 

 

 

 

 

그런데 물건들이 바뀐 후에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지만.. 이 영화는 그냥 그러려니 하게 만드는 그런 힘이 있다. 우연히 낮 시간에 집에 들어왔다가 아비를 만난 후에야. 633은 모든 것을 알게 된다.

 

한마디로 아비는, 닫힌 633의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간 것처럼 굳게 닫혔던 그의 마음을 여는 인물이었던 거다. 낡고 헤진 그의 마음을 새로운 연애로 바꿔주는 사람이기도 하고. 일단 아비를 연기한 왕정문이 이 영화에서 얼마나 예쁘고 매력있는지 모른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결국 아비는 633에게 자신을 다 쏟아붓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마침내 진실을 알게 된 633이 아비에게 데이트를 청했지만, 아비는 이번에는 반대로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게 만든다. 아비는 스스로도 성장의 동력을 만들어냄은 물론, 633도 한층 성장하게 만든다. 헤어진 여자친구에 대한 상실감으로 어딘가 멍하니 살고 있던 633이 다시 전여자친구를 만났을 때 쿨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이 바로 그렇다.

정말 이렇게 부러운 캐릭터가 있나 싶다.

 

 

 

 

이제는 나도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고.. 아마 다시는 누군가를 스토킹 비스므리하게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누군가를 그렇게 좋아할 수 있다는게,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있었다는게, 그 나이때만이 가능한 어떤 것 같아서- 이제 와 생각하니 새삼 아련해진다.

하지만 다신 그렇게는 못하겠지.. 창피해서라도..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