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 / 정리] 러시아 문학의 정리, 라는 아주 오래된 농담 by 김교주
인문학 전공자들이 자기 전공에 갖고 있는 전공부심이 있다. 이 몹쓸 자부심은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내게도 아주 크게 자리잡고 있지만, 다행한 점이 하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전공이나 관심사를 무시하는 쪽으로 비약되지는 않았다는 거다. 하지만 역시 이건 몹쓸 자부심이 맞다.
또 하나, 나를 6개월만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책부심도 내가 가진 몹쓸 우월감 가운데 하나다.
나는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내 책부심이 전공부심보다 나쁜 이유는 거기에 있다. 책 읽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무시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그런 성향이 결코 옳지 못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
전공부심에 책부심이 더해져서, 작가들이 뼈깎는 노력으로(임성한 작가의 말을 빌어 피고름으로) 쓴 작품들을 내멋대로 재단하고 평가를 내리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익숙함을 바탕으로 이 블로그를 시작할 생각을 했었다. 그러고선 무슨 미친 생각이 들었는지 올해,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으로 내 카테고리를 한정하면서 내 스스로 짚더미를 짊어지고 불로 뛰어 들었다.
내가 잘못했다.
모든 학문은, 아니 학문이 아니더라도 세상의 모든 분야는 알면 알수록 심오하고 배우면 배울수록 어려워서 평범한 노력만 갖고서는 절대로(그야말로 절대로, 라는 수식을 붙여도 좋을 정도로 절대로) 일가를 이루기 힘들다는 아주 간단하고도 분명한 원칙을 잊은 게 잘못이었다. 하물며 나는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접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이 한 해를 마무리할 때쯤이면 러시아 문학에 대해 그래도 무언가 감이 잡히지 않을까 실낱같은 기대를 했던 건 내 불찰이었고 오만이었다. 감이 잡히기는 커녕 러시아 새끼들은 나한테 똥을 줬... 아, 이게 아니라...
최소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나마 정리를 하고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시간이 없었다는 말은 핑계다. 차분히 공부하는 심정으로 책을 읽지 못한것은 어디까지나 내 게으름 때문이다. 고로, 정리를 하지 못하는 것 또한 내 게으름 탓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러시아 문학의 방대함을 정리해 보겠다는 야심찬 포부는 그래서 농담이 되었다. 오죽하랴. 국문학을 전공했으면서도 한국문학통사조차 제대로 읽지 못했다. 하물며. 상대는 러시아인 것을.
한 해가 마무리된다. 마무리하고 있다. 나는 올해 50권의 책을 읽었고, 거기에는 이 블로그를 위해 읽은 책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읽었던 책들이므로 새롭게 읽은 책의 숫자에는 집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11권의 책을 더 더해도 좋을 정도로 그들의 글은 새로웠다. 그게 단순히 내 기억력의 문제는 아니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내년에는, 다시 한 번 절대로, 이런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 고 결심한다.
덧: 정리, 에 해당하는 글을 쓰기 위해 올해 내가 읽었던 러시아 작가들의 책을 대강대강 다시 흝어보았다. 그리고는 장렬히 산화...... + 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