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01310 / 톨스토이]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난 그 사실을 몰랐어. by 란테곰

란테곰 2013. 10. 30. 12:53


도프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는 러시아 문학계의 양대산맥이다 라고 많은 사람들이 얘기한다. 하지만 난 저 두 사람의 글을 읽은 적이 없다. 그게 나와 톨스토이 사이에서의 인연의 전부다.

아, 그게 있었다. 예전에 썼던 교지편집부 이야기 ( http://eseses.tistory.com/84 의 애프터 스토오리 쯤 되는 이야기다. 당사자는 얼굴 벌개질 얘기지만 난 당사자가 아니고, 그 당사자가 이 글을 읽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며, 톨스토이와 나 사이의 인연은 저 이야기 외엔 없고 마감은 당장 내일이니 남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보도록 하자.



좋든 싫든 부장을 맡고 나서 보니 2학년은 나 포함 4명 밖에 남지 않았다. 처음에 많이들 가입했던 1학년들은 학기 중에 조금씩 떨어져나가 결국 여름 방학을 맞이해 부실에서 '회의'를 거듭할 즈음엔 총 인원이 8명에 불과했다. 적을 두고 있는 3학년 선배들은 몇몇 있었지만 이미 그들은 수능을 앞둔 예민꾸럭지가 되어있었기에 차마 찾아가 진행이나 아이디어 등에 대해 물어볼 엄두도 내질 못 했다. 그런 총체적 난국 속에서 나는 부장 명찰의 무게감에 짓눌리며 과연 올해는 교지를 어찌 뽑아야 하나라는 고민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도 작년보다 나은 점도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내가 축제의 메인 이벤트인 음악제에 참가를 한다는 점이었다. 이적 목소리를 거의 똑같이 따라하던 친구의 등에 업힌 결과였지만 어쨌거나 그 덕분에 축제 준비 및 당일 행사에서 움직여야 할 많은 것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작년의 아픈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 - 인터뷰는 녹음으로 따지 말자 - 을 바탕으로 한 타개책으로 마련한 설문지도 미리 이백여장을 복사해 두었다. 게다가 연합하고 있던 여고 교지편집부와는 이미 설문지 질문을 공유하여 남고와 여고의 생각 차이를 비교할 수 있는 내용의 글을 공동 작성하기로 얘기를 해놓았기 때문에 분량 면에서도 걱정이 덜 했다. 오오 이 얼마나 훌륭한 발전인가.

어느 새 가을이 되고, 축제날이 다가왔다. 음악제는, 앵콜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준비가 없어 그냥 굴러다니던 MR이 있는 곡으로 부른 앵콜 곡을 내가 말아먹은 것 빼고는 매우 괜찮은 반응을 뽑아냈다. 덕분에 특정 - 예쁜 - 인원 - 여학생 - 에 대한 인터뷰 - 신상 확보 - 도 매우 순조로웠다.  미처 생각지도 못하게 선생님들의 도움의 손길도 이어져 2학년 축제 날만큼 술 많이 마신 날이 없었... 하하. 게다가 연합을 맺고 있던 여학교 애들과의 뒷풀이 자리에서도 이런저런 얘깃거리가 많았던지라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특히, 그 여학우들 중에... 부장이라 그랬나 부부장이라 그랬나. 여튼 그런 지위를 가진 여학우가 뒷풀이 자리에서 나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했었다. 책은 많이 읽냐. 어떤 작가를 좋아하냐. 졸업하고 나면 무슨 과를 갈 예정이냐 등등등. 자기도 책을 좀 읽는 편이고, 최근에서야 죄와 벌을 읽기 시작했는데 도통 진도가 안 나간다믄서. 톨스토이 책은 전부 다 그런가보다 라면서 그 여학우는 술잔을 비웠다. 

음? 톨스토이? 도프토예프스키가 아니라? 

얘가 술이 좀 됐나보구나. 고만 멕여야겠다 라는 머릿속 다짐과 함께 질문을 했다. 그런데, 

응. 톨스토이. 뭐야. 죄와 벌을 톨스토이가 썼다는 것도 몰라? 책 좀 읽었다면서? 

라는 당찬 대답이 돌아왔다. 하하. 더 따지고 들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싶어 나도 그 두 사람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죄와 벌은 도프토예프스키가 쓴 거다. 라고 한 마디 했다. 그 여학우는 뭐 책도 제대로 읽지도 않은 놈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나를 가르치려 드느냐고 소리를 버럭 질렀고, 뒷풀이 자리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어이없어 하는 나와 성질을 버럭버럭 내던 그 여학우를 말리며 그 자리는 그렇게 유야무야 정리되었다. 


1주일쯤 지나서였나. 나와 같은 중학교에 있다가 그 연합한 여고로 진학한 친구를 통해태화 너 뭐냐? 얜 어떻게 알았어? 뭐 이런 반응과 함께 - 편지 한 장을 받았다. 뭐 이런이런 여자애가 너한테 주라 그랬다고. 처음엔 누구지 싶어 와 좀 설렜으나 알고보니 그 여학우였다. 내용은 대략 이랬다. 

자신이 '실수' 로 작가의 이름을 잘못 말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 점을 사람 많은 곳에서 콕 집어 얘기해 면박을 줄 필요가 있었느냐. 사람이 참 좋게 보여서 부끄럽지만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섰는데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다. 연합은 여기서 끊기로 하고, 설문지 질문 공유하기로 했던 일도 없던 것으로 하자. 

그 날 이후 난 동아리 동급생 및 후배들에게 '여학생들과의 유일한 소통 창구' 를 없애버린 죄로, 이유를 불문하고 역적 비스무리한 취급을 받았다. 다행히 교지가 나오기 직전 타 여학교 교지편집부와 연합을 터서 역적 취급은 덜 받았지만, 예전 학교 여학우들이 더 이쁘다는 이유로 백프로 면피되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