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8 / 우울증] 그 후로 오랫동안. by 란테곰
내가 적어놓고도 웃음이 날 정도로 연애하기 매우 그지같은 성향을 가진 나도 운좋게도 연애를 종종 하긴 했다. - 내가 연애하기 참 그지같은 성향을 가졌다는 것은 당연히 연애를 하며 깨달은 것이다 - 노래 가사마냥 만나고, 고백하고, 가슴 떨리고, 설레이고. 웃고, 사랑하고, 키스하고, 함께 하고. 화내고, 의심하고, 소리 지르고, 분노하고. 울고, 미워하고, 미치고, 포기하고. 또 만나고... 의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나아갈거라 생각했지만 웬걸, 내가 변할 생각이 없던 것인지 혹은 의지가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개념이 부족한 것인지는 몰라도 사람이 쉽게 변하지는 않았다.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 간다니 아마 난 앞으로도 누군가를 만나면 - 분명 변하겠다고 나름대로의 노력은 하지만 - 또 비슷한 일련의 과정을 괜히 죄없는 상대방에게 선사하진 않을까 싶은 마음에 몸을 사린지가 꽤 되었다. 응, 쫄은 것 맞다.
여튼, 그간 틈틈히 써둔 글을 마감 바로 전날 실수로 날려버린 자의 멘붕 섞인 자조는 접어두고 주제에 집중하기로 한다. 쓸데없는 것까지 너무나 자세히 설명한 감이 있지만, 난 위에 적었듯 좋.게. 봐.주.면. 매우 긍정적인 놈이라 연애 실패에 따른 이별에도 크고 길게 마음 아파하지는 않았었다. 길어봤자 일주일 정도일까. 하지만 모든 일엔 예외가 있는 법인지라 이별의 후폭풍이 매우 길고 크게 온 경우가 딱 두 번 있었는데, 오늘은 그 중 하나에 대한 얘길 꺼내는 것으로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를 대신하고자 한다. 난 우울증을 한 번도 겪지 못했기에 잘은 모르지만 아마 이런 기분일거다- 싶은 것.
참고로 이 이야기는 http://eseses.tistory.com/20 의 일이 있은 바로 다음 날부터의 이야기다.
그렇게 수많은 담배를 아작내고 눈물에 젖은 선물상자를 쓰레기봉투에 던져버리고서 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지 싶은 기대감을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내가 오빠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오빠랑 같이 있어도 더이상 떨리질 않는다는 그녀의 얘기에 반박을 할 자신이 없다는 것에 대한 절망감은 자고 일어나서도 여전했고, 그렇게 그지같은 기분을 안은 채 알바를 하러 나섰다. 집 바로 아래아랫층에 있는 PC방이었다. 평일 아침이었으니 손님이 많진 않을거란 생각은 했으나 한 명도 없을 줄은 몰랐다. 야간 타임에 일하던 형과 금고 인수인계하고 교대를 하고선 늘 하듯 청소를 시작했다. 하지만 늘 하듯은 청소를 한 것은 아니었다. 평소엔 보이는 곳만 대충 닦아냈으나 그 날은 모니터 뒷면의 얼룩까지 지워내려 그 독한 피비원을 듬뿍 묻혀 벅벅벅벅 걸레질을 해댔고, 바닥 청소는 거의 생활관 미싱질 수준으로 했다. 청소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평소엔 하루 두 대만 포맷하던 컴퓨터를 다섯 대 포맷했다.
청소를 하던 중 큰 사모님이 출근하셨다. 평소엔 큰 사모님 출근 전에 청소를 다 끝내놓고선 농담 따먹으며 살갑게 굴던 내가 완전 썩은 표정으로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만 하고 피씨방과 원수진 듯 청소를 하는 것을 보시고선 뭔가 있었구나라는 낌새를 바로 차리신 듯 했던 큰 사모님은 딱히 아무 말씀 없이 카운터에 앉아 금액 확인에 매진하셨다. 금액 확인을 마치신 큰사모님은 계속 씩씩대며 먼지 하나하나 얼룩 하나하나에 목숨 걸듯 걸레질을 하던 내가 마음에 걸리신 듯 무슨 일 있었냐 여쭤보셨지만 썩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아뇨 아무 일도 없었어요' 라고 대답한 내 표정을 보시곤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렇게 방관에 가까운 상황에서 내 미친 청소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아침 여덟시에 출근해 시작한 청소는 열두시가 다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늘 그렇듯 초딩 습격이 시작되기 전에 식사를 먼저 했던 우리의 점심 상 위에선 대화가 한 마디도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계란옷 입힌 빨간 소세지 반찬도 모래 씹듯 버적대 먹히질 않아 결국 두세수저 뜨고 상을 물렸다. 밥을 남긴 나를 보고 큰 사모님의 걱정어린 눈빛은 점점 깊어져갔다.
손님이 찾아오기 전까지 할 일이 없어진 내겐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탐구의 시간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오분마다 십분마다 한 번씩 한숨을 쉬고선 담배를 피워댔다. 그렇게 아침에 들고 온 담배는 청소 중에 딱 한 대만 피웠음에도 불구하고 오후 두 시를 넘기지 못했고, 난 편의점에 가서 담배를 두 갑 사왔다. 그리고 그 담배들은 내 퇴근 시간인 여덟 시 전에 모두 사라졌다.
이윽고 초딩습격 시간이 시작되었다. 농담도 잘 따먹고 아이템도 나눠주고 30분 추가한다고 해도 서글서글하게 대하던 형이 완전 똥씹은 표정으로 안녕 외엔 말이 없자 몇몇 친한 초딩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보다못한 큰 사모님이 뭐라뭐라 한 말씀 하셨기에 난 억지로 표정을 펴보려 했지만 여전히 썩은 웃음만 나왔다. 머릿속은 온통 그 말에 대한 대답을 못한 자신이 너무 그지같다는 것에만 쏠려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뭐라 말을 해야 좋을까. 이제라도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아니 근데 오빠가 오빠로밖에 안 보인다는데 뭐라고 해야 돼? 라는 루트의 무한반복이었다. 깊이 좌절했다. 한숨 쉬었다. 담배를 피웠다.
늦은 오후가 되며 당시 피씨방의 주력 손님들인 린저씨들이 합류했다. 동네에서 힘주고 다니던 수금 아저씨들이었다. 알바야 커피 한 잔 도- 알바야 핫바 하나 데펴온나- 알바야 배고픈데 뭐 시키봐라- 라는 평소와 같은 부름에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하려 애썼지만 내 표정이 썩긴 썩었는지 린저씨들은 희한한 걸 봤다는 듯 점마 오늘 와 저카노? 해댔다. 하지만 좋지 않은 분위기를 눈치 챈 큰 사모님이 얼른 얘가 뭔 일이 있었는지 표정이 안 좋다며 린저씨들을 달래 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이 필요한 건 커피와 핫바와 저녁 주문이었고 난 그건 확실히 해줬으니 큰 일이 날 것도 없었다. 린저씨중 하나가 담배 피는 내게 다가와 '니 뭔 일 있나? 애인한테 차였나?' 라는 질문에 완전 썩은 웃음 지으며 고개 한 번 끄덕인 이후 린저씨들 사이에선 쟨 당분간 잘 해주자는 분위기가 퍼졌고, 난 그 날 처음으로 린저씨가 사주는 저녁을 얻어먹었다. 오랜만에 보는 탕수육이었는데도 풀 씹듯 씁쓸한 기분이 들어 두어젓갈 뜨고 말았더니 린저씨들은 '아이고 점마 맘 마이 상한갑네-' 하고 들으라는 듯 말했다. 큰 사모님은 한숨을 쉬었고, 나도 한숨을 쉬고 담배를 피웠다.
교대 시간이 되었다. 평소같으면 교대를 하고선 서너시간 피씨방에서 놀다 자러 가던 일상을 무시하고 바로 가게를 나섰다. 이월이라 이미 컴컴한 길을 걸으며 편의점에서 담배를 두 갑 샀다. 그리고 십 분 거리인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날 빤히 바라보며 말하던 그녀의 눈빛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고 너무나 담담하게 말하던 그녀의 말을 비집고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하루종일 생각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잖은가. 결국 그녀의 집 근처 학교 운동장에 쪼그리고 앉아 계속 고민하며 담배를 피웠다. 끝없는 줄담배로 담배 두 갑을 다 피우고 나서도 답은 나오질 않았다. 술이라도 마시면 좀 나아질까 했지만 내 주위엔 함께 술을 마셔줄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혼자 마시자니 그런다고 답이 나오거나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진 않았다. 결국 일어나 한숨 한 번 쉬고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한숨은 끊기지 않았다.그렇게 집에 돌아와 잠을 청했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지 싶은 기대감을 안고.
그 기대감은, 삼 주가 지나서야 겨우 만족되었다.
그 기간동안 몇몇 일이 있었다. 처음엔 이해해주던 린저씨들은 바뀌지 않는 내 표정과 말투의 반복에 지쳤는지 결국 내게 큰소릴 한 번 냈고, 아이템 받는 맛에 찾아오던 몇몇 초딩들은 내 기분만큼이나 짜진 아이템 선물에 질렸는지 다른 PC방에 둥지를 틀었다. 큰 사모님도 내게 한 말씀 하시려고 몇 번이나 기횔 보셨지만 나날이 반짝여가는 피씨방을 보고선 차마 아무 말씀을 못하셨다. 나중에 괜찮아지고 나서야 요즘 피씨방이 조금씩 더러워지는 것 같다고 한 말씀 하셨지만 내 청소 의욕은 더이상 전처럼 불타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내 얼굴에서 썩소가 사라졌고 담배도 많이 줄고 간간히 농담 따먹기도 하고 또 린저씨들 커피 심부름에도 전처럼 대하니 괜찮은 거 아니냐며 큰 사모님을 보고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