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01305 / 장난감] 나는 당신에게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을지라도, 내게 그대는.... by 김교주

hanaholic 2013. 6. 1. 10:40

"나는 아버지보다 더 세련되게 차분하고 자신만만하며 독재적인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다. 소년은 아버지를 경외하며 자랐고, 그에게 아버지란 닮고 싶은 존재, 이상향이다.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네 스스로 취해라.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지 마라. 네 자신 속에 네가 속해 있어야 한단 말이다. 여기에 인생의 모든 일들이 담겨 있는 것이다."

 

라고 가르치는 아버지, 그러나 열 여섯의 소년 앞에 나타난 매력적인 소녀 지나이다는 소년의 몸과 마음을 동시에 흔들어 놓는다.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온몸에 가득 차올랐다. 그 안에는 슬픔과 기쁨, 미래에 대한 기대, 희망 그리고 삶의 두려움이 모두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땐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고, 내 맘속에서 떠도는 그 어떤 것에도 이름을 붙여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단 하나의 이름, 지나이다로 불렀던 것 같다."

 

그리고 소녀는 잔인하게도 이런 소년을 어린애 취급하고 오만방자한 태도로 무시한다. 뭇 남성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어린 아가씨 특유의 도도함과 잔인함에 절망한 소년.

 

"나는 높은 담장 위로 올라가 불행하고 고독하며 슬픔에 빠진 청년처럼 앉아 있곤 했다. 그러면 나 자신이 스스로 가련하게 느껴졌다. 그 슬픈 느낌은 내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고, 나는 거기에 흠뻑 빠졌다."

 

하지만 우리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사랑이라는 폭풍에 휘말린 사춘기 소년에게는 절망 이외에도 무모함과 함께 어리석을 정도의 희망이 동시에 존재한다. 여기에 착각이라는 양념을 조금 곁들이면 사춘기 첫사랑의 레시피는 완벽해진다.

 

"그녀 앞에 서게 되면 나는 뜨거운 불 속에서 타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를 태우고 녹여버리는 그 불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할 까닭은 없었다. 불타면 녹아버리는 것 자체가 내게는 달콤한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온갖 감상에 몸을 내맡기고 나 자신을 농락하며, 추억을 외면하고 또 미래에 대한 어떤 예감에는 눈을 감아버렸다."

 

급기야는 이런 고백을 하기에 이른다!

 

"믿어주세요, 지나이다 알렉산드로브나. 당신이 제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절 아무리 괴롭게 만들어도, 저는 죽는 날까지 당신을 사랑하고 사모할 겁니다."

 

이 소설 전체에는 소년은 미처 모르지만, 조금만 예민한 독자라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무서운 비밀이 숨어 있다. 소년의 고백이 더 처연하고 안스러워 보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마침내 밝혀지는 사건의 전모, 자신은 그동안 이 아름다운 여성은 물론 연적(!)에게까지 노리개 취급을 받았다는 데서 찾아오는 충격.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첫사랑을 추억으로 간직하는 소년에게 남겨진 아버지의 유언.

 

"내 아들아, 여자의 사랑을 두려워해라. 그 행복과 그 독을 두려워해라."

 

 

 

 


첫사랑

저자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출판사
북스캔 | 2007-08-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본 도서는 2009년 12월 31일자로 출판사명이 대교베텔스만에...
가격비교

 

사랑에 실패한 남자가, 특히나 어린 남자가 어떤 성향을 보이는지를 관찰하면 재미있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재미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잔인하지만 대부분의 소년 감성 소유자는 자신을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자신을 차버린 여성은 팜므 파탈의 자리에 두고선 격렬한 연기에 빠져든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마저 기만하는 연기를 펼친다는 점이다. 실지로 그들을 정말 장난감 내지는 노리개로 취급하려는 마음으로 접근한 여성은 극히 드물거나, 혹은 없는데도.

 

작중의 소년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에게는 지나이다가 아닌 다른 변수가 존재한다는 점이 다를 뿐.

 

 

작품을 읽는 내내 진실로, 언어의 흐름과 그 아름다움에 기절할 것 같았다.... 러시아 소설의 스케일이란. 그 문학성이란 아직도 그 끝을 가늠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