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01305 / 장난감] 長 - 難堪. by 란테곰

란테곰 2013. 5. 31. 00:26

초등학교 4학년 즈음이었다. 3학년 때, 이웃동네에 살던 외사촌형들이 가지고 놀던 오락기가 부러웠던 난 '전교 1등' 을 걸고 아버지와 '패밀리(패미컴 : 국내 가정용 게임기 1세대) 사주기' 를 내기로 걸었고, 운좋게도 전교 1등을 해 패밀리를 사는 것에 성공했다. 물론 사촌형들 덕분에 팩 가게(이해를 돕기 위해 부득불 링크 http://blog.naver.com/fckingdom/20184616826) 에서 눈탱이를 맞는 일은 없었지만, 팩에 붙어있던 다 떨어져 가는 스티커 하나를 뗐다고 5천원이면 충분할 것이 만원으로도 모자란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었다. 이제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그땐 그 나름대로 '사회의 씁쓸함'을 맛봤을 그 때 즈음의 이야기다. 

그 때의 우리 집은 서울시 강남구 자곡동 쟁골마을 부근이었다. 강남 8학군 얘기가 신문에 툭하면 나오곤 했던 시대에 '강남구 거주자' 라는 것만으로도 사정 모르는 주위 사람들의 시기와 부러움을 수없이 타던 때였다. 막상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학교 바로 옆 강을 기점으로 해 '서울특별시'과 '경기도 성남' 의 경계에 위치해 있어서 서울 강남구 학생과 경기도 성남 학생들이 함께 등하교를 했었는데, 난 우리 집이 아파트가 아니라 비닐하우스라는 것이 부끄러웠고 또 성남에 살던 친구네 아버지처럼 직업 군인이 아니라는 것이 부끄러웠었다. 아이유가 태어나고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인 93년, 구슬치기, 특히 이찌니쌈은 친구들 사이에서 왕이던 나도 친구들의 '자기네 집이 몇 평이고 몇 층에 산다' 는 기준에서는 못 나가는 놈이었고, 난 그 한해 전이던 92년에 (TV에나 나오는)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실 한가운데에 계단이 놓인 복합 2층 구조의 집을 놀러갔으며, 영실업에서 나온 파스칼124(4합본 팩 하나가 당시 2만원 하던 게임기!!!) 는 없는 아이가 없을 지경이던 상황이었다. 다만 내가 1년 전에 5만원 주고 패밀리을 샀다는 것을 알고 있던 친구들은 날 게임계의 얼리어답터(?) 취급을 해주었다.


어느 날, 난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실 한가운데에 계단이 놓인 복합 2층 구조의 집에 사는 멍청한 친구네 집에 놀러갔었다. 게임을 하는데 안 풀린다고, 모르겠다고, 넌 그 게임을 해봤다 하니 나를 좀 도와달라고. 오락실에 들러서 스파2를 하며 5,6학년 형들을 이기던 재미로 살던 내겐 황금같은 토요일 오후에 집은 잘 살지만 별로 친하지도 않은 멍청한 녀석의 집에서 보내야되나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 전에 몇 번 놀러가봤을 적에 그 집은 늘 우유와 빵(가끔은 무려 햄버거!!)이 간식으로 나왔고 혹여나 저녁이라도 먹게 되면 그 전엔 한 번도 먹어볼 일 없었던 '스팸'이 늘 밥상에 올라왔다는 것이 떠올라 오케이했다. 우리보다 두 살 많은 그 멍청한 친구의 누나가 이뻤다는 것도 이유였다 하하하하.

그 멍청한 친구가 막힌다는 부분을 해결해주고 옆에서 계속 구경을 하다가, 친구의 아버지가 오셨다는 얘기에 얼른 뛰어나가 꾸벅 인사를 했다. 그 땐 뭐 내 아버지 니 아버지가 어딨나. 아버지는 다 아버지, 어머니는 다 어머니하던 때. 다행히 친구 아버지도 어머니도 날 이뻐라해줬는데, 이제와서 보면 맨 처음 놀러왔을 때 그 친구의 어머니가 "넌 몇 등 하니?" 라고 여쭤보셨고 난 "1등 하는데요" 라고 대답했던 것이 컸나 싶으다. 친구 어머니의 얜 뭐야 싶은 표정에서 아이고 그래라는 표정으로 바뀌던 것을 놓치지 않고 봤기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그 친구의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시는 길에 그 친구를 위해 새로운 게임이 담긴 팩을 사오셨다며 그 녀석에게 선물로 주셨다. 와. 진짜로 부러웠다. 팩 교환만 해도 돈이 얼마인데 새 팩이라니. 역시나 잘 사는 집은 다르구나. 끝판 깨기 전까지는 새 팩을 사는 일이 없다는 아부지에게 20판을 넘기면 다시 첫 판으로 돌아간다는 내 항의가 먹히지 않는 우리 집이랑은 다르구나. 나도 이런 아부지랑 살고 싶다는 철없는 생각이 당연하던 때의 난 그렇게 친구 집 저녁밥상에 올라온 스팸을 눈치껏 집어와 씹어먹으며 친구 아버지가 사온 새 게임에 대한 기대를 키워가고 있었다. 친구의 아버지가 사오신 새로운 게임은 말 그대로 새로웠다. 암만 집에 오락기가 있어도 오락실의 퀄리티는 따라갈 수가 없었던 시절에 그 게임은  오락기로도 오락실이랑 비슷한 게임을 할 수 있었다. 얼마나 신기하던지, 평소엔 저녁만 얻어먹고 바로 돌아가곤 했던 내가 해가 지기 전까진 돌아오라 말씀하셨던 아부지의 말씀도 잊고 아홉시 즈음까지 친구가 하는 게임을 지켜보고 있었더랬다.

그 날 이후 '집만 잘 살았지 멍청했던 친구' 는 내 베프가 되었다. 점심시간에 따먹은 구슬도 전부 돌려주고, 수업 시간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는 것도 도와주고, 심지어 학교 끝나고 청소를 하는 것까지 도와주었다. 그 때 당시 내 인생의 목표는 그 게임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는 것이었고, '집만 잘 살았지 멍청했던 친구' 는 환경의 영향인지 가정 교육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감정의 변화가 매우 극심했기 떄문에 난 가급적 그 친구의 비위를 맞춰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난 그 친구의 집에서 저녁밥을 먹으며 '눈치껏' 스팸을 먹는 일도 늘어났고, 그 친구의 이쁜 누나와도 조금씩 친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아버님도 날 조금씩 더 이뻐해주셨다. 공부도 오락처럼 열심히 하라고, 그러면 지금은 어떘든 나중에 잘 될 수 있다고 말씀을 해주시기도 했고 심지어 집에 돌아간다며 신발을 신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간 늦었으니 버스 타고 가라고 오백원을 쥐어주셨을 땐 (그 때 우리 동네 마을버스비는 60원이었다) 진짜 하느님 같았다. 그 사이에 우리 집은 콩에서 토마토로 작물을 바꿨다. 그리고 토마토 지지대는 콩 지지대에 비해 훨씬 두꺼운, 흔히들 알고 있는 각목이었다. 그런데 '집에서 키우는 식물의 지지대' 로 맞는 것은 똑같았지만 종아리는 엉덩이로 바뀌었고 또 그 엉덩이는 처음에 뻘개졌다가 파래져만 갔다. 그리고 엄마는 여전히 그런 아부지를 말리시다 눈물을 쏟으셨다.

 

그러던 중.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난 그 친구가 즐기는 게임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친구의 아버지가 새 게임을 사오셨다 했다. 새 게임은 이전 게임에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훌륭했고, 또 이전 게임에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멍청했던 친구가 계속 막히는 것에 답답해진 내가 패드를 뺏어 한 번에 클리어하자 그 친구는 물론이고 친구의 아버님도 어머님도 누나도 놀랐던 날이었다. 친구에게 이런 저런 설명을 해주고선 캄캄해진 길을 30분 가까이 걸으며 "와 저 게임 정말 재밌었다" 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한편으론 토요일인데 학교가 끝나고선 계속 그 집에 있었으니 집에 가면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할까 생각하고, 어차피 통하지도 않을 거짓말이라 이미 퍼래진 엉덩이에 또 쏟아질 매찜질을 어쩌면 좋나 고민하는 밤이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며 집에 돌아왔는데,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평소같으면 늦은 귀가에 진즉 큰소리가 나왔을 아부지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셨고, 또 평소라면 그런 아부지을 말리느라 바빴을 엄마는 외려 내게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왜 이제와 왔냐며 잔뜩 성을 내셨다. 뭐지? 뭐가 문제지? 어린 나이에도 눈치는 있었어서 아무말 없이 들어오자니 아부지가 잠깐 앉아보라 하시더라. 성적표의 순위가 마음에 안 드셨을 때나 술 한 잔 드신 후에 내 여린(...어렸을 때니까) 성격이 맘에 안 드셨을 때 외엔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는데. 이유야 어쨌든 결과는 내 눈물이 보여야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난 벌써부터 잔뜩 울 준비를 하고 아부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부지는 그런 내 모습을 보시며 한숨을 한 번 쉬시고는 말씀하셨다.

"너, 솔직히 얘기해. ㅇㅇ이네 집에서 오락기 팩 훔쳤지? 어디다 숨겼어?" 평소와 다른 아버님의 분위기만큼이나 놀라운 얘기였다. 내가 뭘 훔쳤다고? 세상에서 제일 맛난 간식과 밥을 늘 챙겨주는 그 집에서? 그 멍청한 친구의 이쁜 누나가 귀엣말로 '내 동생보다 니가 더 낫다' 며 웃으며 얘길 했던 그 집에서? 그 친구의 아버지가 내 아부지였음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잘 해주시던 그 집에서 내가 뭘 어쨌다고?

순식간에 억울함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내 말을 들어줄 상대는 훨씬 전부터 내 얘기가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게다가 내가 그렇게나 따르던 그 친구의 아버지가 우리 집에 전화를 해서 댁네 아들이 우리 아들의 물건을 훔쳐갔네 집안 가정교육이 어쩌네 생난리를 쳤다는 말을 들었을 땐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그래서 계속 울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는 억울함, 그 멍청한 놈네 집의 스팸과 햄버거가 뭐가 그렇게 대단하길래 내가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냐는 분함, 그 친구의 아버지가 내게 잘해주던 모습과 우리 아부지가 들었다는 통화 내역에서의 이질감, 그 이쁜 누나가 내게 가지고 있을 호감이 사라졌을거라는 영 말도 안되는 소실감까지 더해져 진짜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였다. 내 그런 모습을 보던 엄마도 우셨고, 아부지도 눈물이 눈에 맺혔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 겨우 숨을 돌린 난 말했다. 훔치지 않았다고. 내가 훔쳤으면 진짜 뭐라도 하겠다고, 친구 아버지랑 통화하게 해달라고. 전화를 걸었다. 날 그렇게나 좋아해주시던 친구의 아버님이 받았다. 그 때의 얘기는 아직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한다. "넌 학교에서도 공부 잘 한다고 소문이 좋고 친구들이랑도 잘 지낸다고 얘길 많이 들어서 ㅇㅇ이랑 지내게 해줬는데, 부러운 건 알겠지만 왜 그런 짓을 하니? 이제라도 솔직히 얘길 하면 조용히 넘어갈테니까 내일 ㅇㅇ이에게 조용히 팩 돌려주렴." 

억울했다. 아니라 했다. 내 종아리에 회초리를 때리던 엄마는 그놈의 스팸이 그렇게 맛있냐면서, 앞으로 집에서도 해줄테니까 그딴 집 놀러가지 말라면서 회초리 자욱 남은 내 종아리를 쓰다듬으며 우셨다. 콩 대신 토마토로 작물을 바꿨기에 토마토 지지대라 쓰고 각목이라 부르는 나무로 엎드려있던 내 엉덩이를 때리던 아부지는 니 말이 사실이냐며 몇 번이고 되물으셨고, 아무리 맞아도 사실이라 하자 그러면 부끄러워 말고 내일 학교 가서 당당히 그 친구한테 난 안 훔쳤다고 얘기해라라며 눈물맺힌 고개를 돌리셨다.


다음 주 월요일. 하루에 천 리를 간다던 발 없는 말이 있었는지 난 아무 말도 안 했음에도 도둑놈 취급을 받았다. 난 계속 아니라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나와 말을 섞지도 않았다. 심지어 담임선생님이 점심시간에 날 교무실로 불러 "ㅇㅇ이네서 팩을 훔쳤다는게 사실이냐?" 며 물어보시기도 했다. 난 아니라고 얘기했지만 선생님의 의심어린 표정은 바뀌지 않았고, 학교에서 내 본의아닌 침묵은 일주일 가까이 이어져갔다. 구슬이 암만 많아도 게임에 끼어주지 않았고, 게임이 암만 막혀도 날 부르는 친구는 없었으며, 심지어 음악 시간에 남자 여자 짝을 지어 돌림노래를 하는 것도 내 여자 짝이 "도둑놈이랑 짝하는 건 싫다" 해서 그냥 멀뚱히 앉았기도 했었다. 억울한 마음에 매일 숙제였던 일기에 난 훔친 적 없다는 내용의 일기를 썼다. 다른 때면 늘 한두마디씩 적고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 돌려주던 선생님은 아무 말씀 없이 참 잘했어요 도장만 찍어주셨다. 

사단이 났던 날에서 한 주 지난 토요일이었다. ㅇㅇ이네 집 근처에 사는 ㅈㅈ이가 놀러오라고 날 불렀다. 얜 나보다 오히려 ㅇㅇ이랑 친한데 왜 나를 부르지? 싶었으나 그 집은 놀러가면 '햄을 잘게 썰어넣은 계란말이로 유명한 집' 이었기에 오케이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한 집의 계란말이를 맘껏 먹고 배부르다는 의사표시를 할 즈음, ㅈㅈ이의 어머니가 나를 조용히 불러내셨다. 

"너 ㅇㅇ이네서 게임기 팩 훔쳤다며? 암만 갖고 싶어도 그렇지 그러는거 아니야. 그리고 조용히 돌려주면 아무렇지도 않을 일을 왜 버티고 있니? 친구 사이에 그러는 거 아니야. 빌려달라고 얘기를 하면 어련히 안 빌려주겠니. 얼른 돌려줘. 그래야 ㅈㅈ이랑 ㅇㅇ이랑 셋이 같이 놀지."

어린 나이에도 그 얘기가 무슨 얘기인지는 충분히 느껴졌고, 난 또 한 번 사람의 호의를 보이는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하. 웃음이 났다. 아무도 내 말은 안 믿는구나. 아부지랑 엄마 말고는 아무도. 아부지나 엄마한테 이 얘길 하면 분명 또 속상해하실테니 나만 알기로 하고선 조용히 가방을 메고 ㅈㅈ이네 어머니께 꾸벅 인사를 하고는 ㅈㅈ이네 집을 나섰다. 집까지 가는 삼십여분 내내 억울해서 울었다. 근데 또 괜히 얘기를 꺼내면 아부지랑 엄마가 슬퍼하실테니 티를 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해서 난 집 바로 앞 하천가에 억지로 오른발을 쑤셔넣어 진흙투성이를 만들고는 집에 들어갔다. 뛰다가 자빠지면서 이리 됐는데 너무 아파서 울었다고 엄마한테 말했는데 신발을 버렸다는 이유로 아부지한테 혼났다. (이 내용도 역시 일기에 썼지만, 돌아온 내 일기장엔 참 잘했어요 도장만 찍혀있었다.)

 

그날 밤, 전화가 왔다. 우리 아부지랑 한참 통화를 했다. 아부지는 분하셨는지 몇 번 큰소리를 내셨고, 엄마 역시 옆에서 몇 마디를 거드셨다. 나중에 얘길 들어보니 ㅇㅇ네 아버지가 전화를 하셨다는데, 집 청소를 하다가 침대 밑에서 팩을 찾았다고, 정말로 미안하다 했다는 전화였다. 오해가 풀리고 사과를 받았는데도 슬펐다. 스팸이랑 맛난 간식 때문에 부린 내 욕심이 날 자연스럽게 도둑놈 취급할 수 있게 되는거고 또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되는거구나 싶어서 엉엉 울었다. 아부지도, 엄마도 함께 울었다. 영문을 모르던 내 동생은 그냥 우리가 우니까 따라 울었다. 

다음 주 월요일. 학교에 등교하자마자 ㅇㅇ이가 ㅈㅈ이를 데리고 쭈뼛쭈뼛 다가와서 오해해서 미안했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 얘기가 돌았는지 다른 애들도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자기네 아버지가 꼭 사과를 하고 싶은데 마땅히 방법을 모르겠어서 그러니 이거라도 받아달라고 하면서 내민 것은 내가 훔쳤다고 얘길 들었던 팩이었다. 난 아무 말 없이 ㅇㅇ이가 내민 팩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순간 사과를 받은건지 동정을 받은건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내가 맞는 것도 아프지만 내가 누굴 때리는 것도 아프다는 걸 어릴 적에 싸우며 깨닫고 난 뒤에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음에도, 억울함과 괘씸함과 뻔뻔함이 기가 막혀 진짜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그래서 때렸다. 그리고 선생님한테 혼났다. 난 울며 내 억울함과 ㅇㅇ이의 괘씸한 태도와 뻔뻔한 발언을 호소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친구를 때리면 안 된다 했다. 그래서 저런 놈은 친구 아닌데요? 라고 대답했다가 또 혼났다. 

하지만 그 일이 있을 직후 반 친구들과의 관계가 역전되었다. 난 (거진 하루 종일) 오해해서 미안했다는 얘기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예전처럼 돌아갔지만 ㅇㅇ이와 ㅈㅈ이는 고립되다시피 했다. 선생님한테 혼났다는 것이 억울하고 또 억울했던 난 학교가 끝난 후 집에 와서 부모님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아부지와 엄마는 그런 건 참는 거 아니라고, 받는 것도 아니라고, 정말로 잘 했다고 하셨다. 어디 가서 밑보이면 안된다는 얘기도 해주셨다. 하지만 친구를 때리는 건 잘못된 거라고 혼났다. 그럴 땐 안 때리는게 이기는거라 하시면서. 그날 밤, 토마토 지지대로 맞은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일기로 썼다. 다음 날 하교하며 돌려받은 일기장엔 지난 일주일 사이엔 없던 선생님의 몇 마디가 적혀있었다. 오해가 풀렸으니 이젠 둘이 예전처럼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선생님이 널 믿어주질 못해서 미안했다고. 엉덩이는 괜찮냐고. 하지만 그 일을 통해 부쩍 자라버린 난 더 이상은 내 일기장에 쓰이는 선생님의 메모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채 한 달이 못 되어서 ㅇㅇ이네 집은 이사를 갔고 ㅇㅇ이는 전학을 갔다. 학교에서 내내 친구를 무시한 놈으로 손가락질당하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나보다. ㅇㅇ이가 전학을 간 이후 ㅇㅇ이와 친했던 ㅈㅈ이는 더욱 움츠러들어 나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질 못했다. 그리고 한 학기가 지난 즈음 ㅈㅈ이네 집은 이사를 갔고, ㅈㅈ이는 전학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