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도 얘기한 적 있는데- 나는 어려서부터 엄마 덕분에 영화를 많이 보면서 자랐다. 내가 다섯살 무렵부터 집에 VTR이 있었다. 엄마는 VTR로 TV에서 하는 영화를 녹화해놨다가 보기도 했고,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를 빌려서 보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엄마랑 같이 안방에 앉아서 영화를 보곤 했다.
80년대 중반에서부터 90년대 초반까지는 홍콩 영화의 전성기였다. 자연히 엄마가 빌려오는 비디오도 홍콩 영화의 비중이 컸다. 엄마는 영화를 골고루 보면서도 취향이 분명한 편이었는데, 주윤발이 나오는 영화들은 거의 못 본 대신 성룡이 나오는 영화들은 많이 봤다. (지금까지도 성룡 영화 중에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 그 시절 봤던 <용형호제> 1, 2편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홍콩 무협 영화를 많이 보기 시작했다. 처음 봤던 무협 영화가 <신용문객잔>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이 영화를 만났다.
※ 스포일러 주의
이 작품은 중국의 소설가인 김용의 무협 소설 [소오강호]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무협지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김용과 [소호강호]는 엄청 유명한 이름이라고 들었다. (난 무협지를 읽어본 적이 없어서 그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까지는 잘 모른다, 현재까지도 -ㅅ-)
<동방불패>의 배경은 일본의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 이후, 그에 반대하는 일본 낭인들이 중국으로 건너와 왜구로 활동하던 시절이다. 화산파의 수제자 영호충(이연걸)은 사제들과 함께 강호를 떠나기로 마음 먹고 길을 떠나던 중 1년 전 약속했던 만남을 위해 묘족 일월신교 교주 임아행의 딸 임영영(관지림)을 만나러 간다. 그러나 임영영은 영호충이 도착하기 전 공격을 받고 사라진 상태였다.
임영영 무리를 공격한 것은 일본 낭인들로, 그들은 임아행을 몰아내고 새롭게 교주 자리에 오른 동방불패(임청하)에게 협력하고 있었다. 동방불패는 황제의 자리까지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은 인물로, '규화보전'이라는 신비한 무공을 익힌 최고의 실력자였다.
영호충은 임영영을 찾으러 가던 도중 우연히 강에서 동방불패와 만나게 된다. 영호충은 그를 여자라 생각하고 호감을 갖게 된다.
위의 '입 안대고 술먹기' 장면이 엄청 유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해보면 알겠지만 입 안대고 뭔가 마시는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예전에 어떤 배우가 저 기술(?)을 연습해서 오디션 때 선보인 적이 있다고 방송에서 발하는 걸 본 적도 있다.
사실 내가 임청하를 처음 본 것이 이 영화는 아니었다. 앞서 말했던 <신용문객잔>에도 나왔고. 그렇지만 이 영화가 임청하의 대표작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 속에서 남자였다가 규화보전을 익힌 후 여자로 변하는 동방불패 캐릭터를 신비로운 외모와 함께 멋지게 연기해낸 그녀는 이후에도 남장 여자 같은 역을 많이 했다. 뭐, <동사서독>도 그렇고. 내가 봤던 어떤 영화에서는 아예 남자로 나왔는데 그 영화 제목이 기억이 안난다..
아무튼 이 영화는 정말 '임청하에게 반하기 충분한' 영화였다. 남자주인공인 이연걸은 거의 기억도 안 났다. 몇년 후 <방세옥>을 거쳐 <황비홍>으로 스타가 된 이후에야 "아 맞다, 이연걸이 <동방불패>에 나왔었지?" 하고 생각났을 정도니까.
이후의 스토리.
임영영을 만난 영호충은 임아행을 구하러 갔다가 다시 동방불패와 만난다. 여전히 정체를 숨기고 있던 동방불패는 영호충과 같이 시간을 보낸다. 그들을 따라온 일본 낭인과 대결하던 영호충은 그들에게 사로잡혀 동방불패의 지하 감옥에 갇히고, 임아행도 그곳에 갇혀 있음을 알게 되고 같이 탈출한다. 만물을 흡수하는 무공인 흡성대법을 하는 임아행은 배신자를 처단하고 다시 일월신교의 교주로 복귀하고자 한다. 영호충은 다시 강호를 떠나고자 마음먹고 동방불패를 만나러 찾아가는데, 동방불패는 자신의 애첩 시시를 자신인 척 하고 영호충과 동침하게 한다. 그리고 본인은 임아행 무리를 처치하러 찾아갔다가 영호충의 사제들을 죽이게 된다.
사제들의 죽음에 분노에 찬 영호충은 임아행과 함께 동방불패를 공격해오고, 거기서 처음으로 동방불패의 정체를 알게 된다. 영호충과 동방불패는 접전을 펼치지만, 동방불패는 마지막 순간에 영호충에게 가하던 공격을 멈춰버린다. 동시에 영호충의 칼은 동방불패를 찔러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
그리고- 이제 내가 이 영화를 잊을 수 없게 만든 장면.
절벽으로 떨어지는 동방불패를 붙잡고, 영호충은 자신과 같이 밤을 보낸 사람이 그녀인지를 묻는다. 동방불패는 대답하지 않고, 영호충을 밀어낸 후 홀로 아름답게 추락한다.
겨우 초등학생(물론 그때는 '국민학생'이라고 불렸지만...)이었던 나에게 이 장면이 왜 그렇게 마음 아팠는지 모르겠다. 임청하의 아름다운 모습과, 영호충의 안타까운 마음과, 동방불패의 마지막 미소와, "평생 후회하도록 절대 말해주지 않겠다." 라는 그 대사와.. (내가 봤던 비디오에서의 대사는 저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것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 자려고 누웠는데 막 생각날 정도였다.
그렇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내게 처음으로 나에게 '영화를 좋아한다'는 인지를 갖게 해준 영화였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그냥 재미로 영화를 봤고, 영화를 다양하게 봐야 한다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이 이후였던 것 같다. 장래 직업으로 영화 관련된 일을 꿈꾸기 시작했던 것도 이 영화 이후였다. 대학을 관련 학과 쪽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거니까,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내 인생의 초반부를 결정해준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어렸을 땐 미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참 설렜었다. 장래희망으로 뭔가를 쓰면, 그게 거의 확정된 것만 같았다.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난 내가 영화 기자가 될 거라고 50%쯤 믿고 있었다.
결국은 참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지만.
아직도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이젠 정말 그냥 취미 생활이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만큼 즐겁게 영화를 보지 못하는 것 같다. 설레는 느낌이 빠져서 그런 걸까.. 하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다.
나이를 먹는다는건, 이래저래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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